‘전태일의 달’인 11월에 양대 노총이 노동자대회를 치렀다. 12월 대선도 있어 대통령 후보들도 노동자대회에 참가해 이런저런 장밋빛 공약을 내놨다. 평상시에는 정치권의 관심도 못 끌던 노조전임자 급여,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비정규직 처우 등을 앞장서 고치겠단다. 하지만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 될 공산이 크다.

스스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터에, 그에 앞서 이명박 정권이 너무나 못해 주는 덕에 뒤늦게 체면을 차린 듯하지만 5년 전인 2007년 12월을 돌이켜 보면 사회경제적으로 ‘노명박’ 정권인지, ‘이무현’ 정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개인 노무현이 주는 인간적 매력과는 별개로, 대통령 노무현으로서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물론 정치적 민주주의에서조차 실패한 것이었다. 그 결과가 이명박 정권의 출현이었다. 노무현 정권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진전에 열과 성을 다했더라면 정치적 민주주의는 튼튼해졌을 것이고, ‘이명박 대통령’이란 말은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라진 ‘노동자 정치세력화’

이제 역사는 반복돼 이명박은 박근혜의 모습으로, 노무현은 문재인과 안철수의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분명한 색깔을 보여 줬고, 2007년까지 자기 목소리를 유지했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2012년 대선에서 자리를 잃어버렸다. 수구정당과 보수정당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한국노총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역량을 강화하자는 민주노총의 목소리가 사라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우경화해 분해되고, 보수정당의 자유주의 세력과 합당한 통합진보당이 정파들의 무능과 과욕에 따른 총체적 부실·부정선거로 내파(內破)되면서 1987년 이래 한국 노동운동이 줄기차게 추진해 왔던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사실상 일단락됐다. 그 와중에서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주체인 민주노총은 소모적이고 폐쇄적인 직선제 논란에 휩싸였다. 2012년 11월 오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운동의 대중적 염원과 공식적 요구가 아니라 몇몇 정파들의 초라한 목소리로 전락해 버렸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은 △산별노조 건설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동운동의 자기 개혁이라는 3대 과제를 고민해 왔다. 산별노조는 “무늬만이라도” 산별노조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민주노총에 속한 노조원의 80% 가까이 산별노조에 속해 있다. 이제 무늬를 넘어 살과 뼈대에서 산별노조를 세우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나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계와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우리 역사와 실정에 맞는 산별노조를 구축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

노동운동의 자기 개혁이 돌파구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실패로 일단락됐다. 이 실패가 잠정적일지 장기적일지는 노동운동의 역량에 따라 결정될 것인데, 현재의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상황을 종합해 보면 낙관보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해 보인다. 정치세력화는 이념과 노선의 정립이 필수적인데, 민주노총의 경우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과잉되면서 노동계급의 독자성을 가로막았다. 한국노총의 경우 이명박-박근혜 시기를 거치면서 역사적으로 개발독재와 군사파시즘에 연계된 세력이 여전히 강고함을 확인할 수 있다. 1997년 국민승리21,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 같은 노동운동의 대중적 염원과 공식결의를 담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흐름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문제는 노동운동의 자기 개혁이 아닐까 싶다. 이는 정확한 자기진단과 평가가 출발점이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가진 자원과 인력이 얼마나 되고 그 수준은 어떤가. 조직구조와 사업방식에서 문제점은 무엇인가. 인력운용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조직 분위기는 아닌가. 신상필벌이 공정하게 이뤄지고 있는가. 상급단체에 현장에서 검증되고 사회·대학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인력이 배치·채용되는가. 현장 활동을 잘하고 상급단체에서 단련된 균형감과 상식을 가진 지도부가 선출되는가. 이념과 노선이 불명확하다는 핑계로 기회주의와 극단주의가 넘실대지는 않는가. 노동운동이 사회적 권위를 회복하고 운동 기풍을 쇄신할 방법은 무엇인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측면에서, 2012년 12월 대선은 1997년 이래 가장 후퇴된 수준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은 오늘이 쌓여 만들어지는 법. 노동운동에 돌파구를 내기 위해 뜻있는 모두가 지혜와 힘을 모을 때다. 결국 사람이 희망 아니던가.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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