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정리해고는 노동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정리해고 경험이 있었던 사업장에서는 작은 경기 변동이나 부분적 사업재편으로 인한 생산량 변동에도 고용불안을 느끼는 사례가 많다. 그리고 사업주는 노동자들의 이러한 불안감을 이용해 민주노조를 약화시키거나 노동조건을 악화시킨다.

98년 가장 큰 구조조정을 겪었던 옛 한라그룹 사업장들과 대우그룹 소속 사업장에서 최근 몇 년간 어용노조 설립이 많았던 것도 노동자들의 가슴에 뿌리 깊게 새겨진 고용불안 공포와 관련이 크다. 한라그룹 소속이었던 발레오만도·보쉬전장·만도, 대우그룹 소속이었던 두산인프라코어에서 사업주들은 경영위기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어용노조 설립에 성공했다. 물론 사후적으로 확인된 바는 이들 사업장의 경영위기설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민주노조 와해를 목적으로 한 사기였다.

비슷한 일이 다시 옛 대우그룹 소속에서 가장 큰 사업장인 한국지엠에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 5일 지엠(GM) 본사에서 2014년 출시 예정인 차세대 크루즈 모델을 한국에서 생산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현재 군산공장에서 생산 중인 쉐보레 크루즈는 한국지엠이 생산하는 대표적인 준·중형차이자 2008년 이후 글로벌 지엠을 파산에서 구해 낸 1등 공신이다. 한국지엠은 군산공장에서 지난해 21만대의 크루즈(전 모델인 라세티 포함)를 생산해 18만대를 수출했다. 우즈베키스탄·중국·미국 등으로 수출되는 반조립품까지 합하면 전 세계 크루즈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생산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지엠의 대표 차종이자 군산공장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크루즈의 차세대 모델을 한국에서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산물량과 고용안정을 등치시켜 생각하는 노동자들에게 이만큼 불안한 일이 있을까.

그렇다면 이로 인해 한국지엠 노동자, 특히 군산공장 노동자들이 심각한 고용위기에 빠질까. 필자 생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지엠의 발표가 다분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지엠은 신차 생산 배정에서 경영적 판단만이 아니라 각국의 정치 상황, 노동조합 상황을 동시에 고려한다. 2009년 유럽공장 폐쇄를 두고 독일·영국·스페인·벨기에 정부를 경쟁시키며 이득을 취한 사례가 그랬다. 지난해 말 독일 금속노조의 양보를 받아 내기 위해 신차 투입을 두고 폴란드·한국과 독일공장을 경쟁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100년간 전 세계에서 공장을 운영해 온 원조 글로벌기업 지엠의 특기 중 하나가 바로 공장 간 경쟁을 통해 임금은 깎고, 정부지원은 더 얻어 내는 것이다. 한국지엠의 상황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지엠의 발표는 순수하게 경영적 목표로 작성된 글로벌 생산재편보다는 오랜 침체를 딛고 최근 다시 힘찬 투쟁을 진행 중인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와 관계돼 보인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는 대우차가 지엠으로 매각된 이후 처음으로 두 달 가까운 부분파업을 벌였다. 심지어 사무직까지 파업에 동참해 임금·단체협상을 진행했다. 쟁의행위나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에서는 사측의 노무관리가 무력화된 모습도 나타났다.

지엠 사측이 ‘물량 이전-고용불안’ 프레임을 이용해 올해 빼앗긴 노사관계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지엠이 차세대 크루즈 생산에서 한국을 배제하겠다는 발표를 임단협의 결과물인 주간연속 2교대제와 사무직 임금체계 개선 교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1월에 발표한 이유일 것이다.

지엠의 정치적 판단은 올해 차세대 크루즈 관련 첫 발표를 미국 로즈타운 공장에서 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엠이 공화당 롬니보다 민주당 오바마에 친화적인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오바마 정부는 지엠에 막대한 구제금융을 지원한 것은 물론 미국에서 제조업이 육성될 수 있도록 장기적 지원을 약속했다. 지엠이 차세대 크루즈 모델 생산공장을 미국 대선 초경합주인 오하이오 공장(로즈타운)으로 선택하고, 그것을 대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올해 여름에 발표한 배경이다.

지엠은 앞으로 생산성과 비용을 들먹거리며 한국지엠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주간연속 2교대제나 사무직 임금체계 개선도 사측 의도대로 끌고 가려 할 것이다. 지엠의 예전 사례를 보면 이를 가지고 노조를 압박하다 적당한 시점에 군산공장에서도 차세대 크루즈를 생산하기로 했다든가, 아니면 다른 신차 모델을 생산하기로 했다는 식의 발표를 할 것이다. 100여년 동안 이어진 지엠의 스타일이다.

한국지엠 노동자들은 지엠의 물량 협박에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임단협의 성과를 굳건하게 지키고, 이번 기회에 본사와 직접교섭을 요구하는 배포를 보여야 한다. 물량 협박에 굴해서는 이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다. 자신감 있는 대응만이 ‘물량 협박-노동권 악화’라는 악순환을 끊어 낼 수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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