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이젠 이런 꼴 보는 것도 이골이 났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노동자는 투쟁한다고 철탑에 오르고 교각에 매달리고 단식농성인데 그들은 문재인 캠프로, 안철수 캠프로 몰려가고 있다. 민주노총의 노조 위원장이거나 위원장였던, 노조의 무슨 간부이거나 간부였던 그들이 노동위원회·노동연대센터라는 대선후보의 노동지원단으로 문재인과 안철수의 품으로 갔다. 그들 중 누가 스스로를 배신이라 생각할까. 그들과 함께 노동계로 불리우는 노동운동은 이제 배신이라 침을 뱉을 힘조차 잃어 버렸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이 나라에선 노동계 인사로 불리며 그들을 불러주는 권력의 품에 안겨 왔다. 집권하고 있는 여당이든 집권을 노리는 야당이든 권력을 향해서 날아갔다. 민주의 당에는 민주를 외치며, 진보의 당에는 진보를 외치며, 또는 보수의 당에도 노동을 외치며 가고 갔다. 돌이켜보면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언제나 그래왔다. 그러니 노동운동은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경력 쌓기 운동이었던 거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경제활동이 결국 자본의 재생산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이 나라에서 모든 운동은 결국 권력의 재생산으로 연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권력의 하위범주로 노조운동은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였나. 노동현장에서조차도 자본과의 투쟁을 위해서 그들을 부르고 권력에 매달린다. 투쟁이 다급하면 더 다급하게 권력을 찾고 그것이 노조운동이라면서 노동현장 경험있는 그들이 당권자이고, 의원이라고 쉽게 연락해서 부탁해왔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은, 어쩌다 대열의 이탈자가 아니라 노조운동의 한 대열이 몰려가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배신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나라 노동운동의 구조고 본질이라고 해야 한다.

2. 우리는 한 발짝도 더 떼지 못했다. 저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던 80년대 학생운동의 인식과 방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거기서 퇴행적인 몸짓을 해대고 있다. 노동운동은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민주의 과제에 매달리는 민족민중운동의 부분일뿐이다. 그 운동이 민족을 부여잡고 있든 민중을 부여잡고 있든 마찬가지다. 결국에는 우리는 민주로 동지와 적을 구분한다. 어쩌면 박정희 이후 몇 십 년을 그래왔다. 민주 앞에만 서면, 대선을 앞에 두고는 운동은 쪼그라들고 만다. 민주세력으로서 노동운동은 전두환·노태우·이명박의 퇴진 투쟁에, 민정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의 반대 대열에 모여야 했다. 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그랬다. 우리의 심장은 민주의 언어에 자동 반응해서 광장에 쏟아져 나오고, 우리의 다리는 민주의 노래에 즉시 반응해서 거리를 질주한다. 그러나 우리의 심장도 다리도 노동의 언어와 노래에는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정세를 고려하고 운동의 과제를 검토하고서야 계획적으로만 반응했다. 대부분 그것은 민주로 각색되고서야 반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80년대식 언어고 노래였다. 그런데 거기서 제자리걸음하다가 퇴행적인 몸짓을 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서 지금 노동운동진영이 그렇다.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는 민주로 극복할 수 있다하고 있다.

3. 내가 지금 무슨 노동계급의 사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무슨 과학이라는 이름의 주의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저 그 모든 것의 출발이고 전제인 것, 바로 노동운동의 존립의 근거에 관해 말하고 있다. 민주로 세상을 보는 자는 민주주의자다. 그에게는 그가, 민주세력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그의 목표고 그걸 민주정치·민주정부 등 민주라 부른다. 그러나 독립적인 노동의 운동이라면 이 민주주의도 노동으로 바라봐야 한다. 노동자에게는 노동자가 자신을 복종시키는 권력을 부정하고서 스스로 지배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고 그걸 자신의 민주주의라 불러야 한다. 노동자에게 민주주의인 것이 민주라고 노동운동은 외쳐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나라에서는 민주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공용어라고 노동운동은 민주주의를 외쳐왔다. 혹은 민주주의자의 민주가 먼저고 그 다음이 노동자의 민주 차례라고 노동운동은 말해왔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그 운동을 뭐라 해야 할까. 그냥 민주운동이 주문한 노동자의 역할을 수행해 온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노동운동이라고 그것이 현 시기의 운동인 것이라고 우리는 80년대 전두환 정권 때부터 날마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에게 말해왔다. 그런데 우리와 다름없이 그런 인식과 방법으로 활동해 왔던 그들이 문재인과 안철수의 캠프로 몰려가고 있다. 특정정파성향의 그들이라고 평가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바라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정파성향이 그들의 선택을 쉽게 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성향이란 것도 결국 우리의 인식과 방법의 한 줄기였을 뿐이다. 그들의 선택은 사실 무엇이 현실적이냐로 정해졌다. 민주가 우선이다. 이것은 그들이 아니라도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진영의 거의 일치된 인식이고 현 시기 운동의 방법이다. 단지 그들과 남아있는 자들과는 노동으로 진보로 뭉친 후에 민주로 연대할 것이냐 아니냐로 갈라질 뿐이다. 그들은 그간 진보정당운동 경험으로 그것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고 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연대의 길로 갔다. 이처럼 고작 현실성으로만 그들과 남은 자들을 가르고 있다는 것, 나는 이것이 이 나라 노동운동이 독자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이유이며 결과라고 본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그들을 배신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우리의 운동은 민주 앞에서는 하나였었고, 지금도 그것으로 하나여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데. 더구나 지금 노동운동의 과제라는 것도 민주의 과제에 포섭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러니 결국 현실성이라는 실현가능성이 더욱 부각되고 그들은 관념론에 빠진 몽상가가 아닌 실사구시의 실천가라고 그들의 지지자들은 인식하는 것이다. 현실성이라는 잣대로 재단하게 되면 결국은 노동운동은 부정당하고 만다. 가장 현실적인 것은 노동이 복종하고 있는 현재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의 질서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현실에서는 그 질서를 넘어서는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노동운동은 비현실적이다. 거기서 현실적인 과제를 설정하는 순간 노동운동은 이제 민주의 당과 연대하고 민주의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노동의 질서는 비현실적인데 비해 민주의 질서는 현실적이다. 전자와는 달리 후자는 현재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민주를 우선하는 순간 운동은 현실적인 것이 되고, 거기서부터 노동운동은 부당당하기 시작한다.

4. 지금 노동운동은 인민의 10%를 밑도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연대와 동맹을 통해서만 노동의 질서를 확보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이미 인민의 50% 이상이 노동자와 그 피부양자다. 너무 많아서 묶어 세우기 힘들 만큼 압도적인 다수다. 노동자만 묶어내도 자본의 부정이든 자본과의 공존이든 어떠한 노동의 질서라도 세워 낼 수 있다. 그런데도 노동운동은 민주로 자신을 부정하고 서 있다. 그리고 그 민주의 과제에 노동의 열악한, 그래서 부당한 것의 개선을 포섭시켜서 현 시기 노동운동의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노동의 가장 열악한, 그래서 위법하고 부당한 것의 개선은 보수의 당, 새누리당의 후보라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동의 열악한 부분에 관한 개선이 반드시 노동운동이 내세워야 할 과제인 것은 아니다. 지금 노동운동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를 묶어세우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이다. 노동의 열악한 부분의 개선만을 그 과제로 설정하고 외쳐 대서는 열악하지 않는 노동자까지 자신에게 묶어세울 수 없다. 낮은 수준의 과제만이 보다 많은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에 묶어세우는 것이 아니다. 낮은 수준의 과제를 외쳐 대서는 그 수준의 권리가 이미 확보돼 있는 노동자 일반을 무관심하게 하고 결국 지원과 연대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오히려 높은 수준의 과제일수록 그것을 자신이 확보해야 하는 권리로 인식하는 보다 많은 노동자를 관심을 갖게 해서 노동운동에 묶어세울 수 있다. 노동자 일반을 노동운동에 묶어세우려면 노동자 일반의 권리 확보를 주장해서 전개돼야 하는 게 당연한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그 반대로 해서 전개돼 왔다.

5. 이 나라 노동운동이 배신의 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제를 민주의 과제 내로 포섭시켜 온 운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으로 노동은 민주와 분리된 자신의 영토를 가질 수 있고 노동운동은 자신의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개량이든 뭐든, 자신의 성안에 운동의 역량을 축적해 나갈 수 있다. 민주나 진보의 눈으로 노동운동의 과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눈으로 노동운동의 과제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 민주나 진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나라 노동운동은 정파와 주의를 떠나 노동으로 독자성을 확보하는 인식과 방법으로 해서만 배신의 질서를 끊어 내고 전진해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민주와 노동의 경계를 분명히 세우고 노동으로 우리를 설정하는 것, 거기서부터 노동운동은 재정립돼야 한다. 그래야 노동운동은 노동의 배신을 배신이라며 침을 뱉을 수 있는 것이다. 배신이 질서여서는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의 내일은 없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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