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라는 한국사회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선거가 있는 해다.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은 정권교체와 2013년 체제를 말한다. 그런데 정작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87년 민주화와 노동자 대투쟁의 주역인 노동자들은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거대 담론에 비껴 있다. “노동 없는 시장으로의 질주가 계속된다면 경제와 민주주의 모두 유지될 수 없다.” 진보진영의 대표적 원로학자 최장집(69·사진) 고려대 명예교수의 진단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창립 20주년 및 지령 5천호 발간을 기념해 지난 22일 오전 서울 중구 경향신문건물 경향시민대학 학장실에서 최 교수를 만났다. 그는 최근 노동자·서민의 삶의 현장을 찾아 문제의식을 기록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발간했다. 최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년)와 <위기의 노동>(2005년)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시민권 추락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위기다”

-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그간 정치적·사회적 이슈로서 많은 문제들이 제기됐지만 가장 중요한 소외계층과 노동자의 삶의 실상에 대해서는 뉴스나 정치적 의제, 학문적 주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있는 시기다. 노동자와 소외세력의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제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 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속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노동의 시민권’ 추락을 지적했는데.

"87년 민주화가 되면서 과거 권위주의 시기 경제성장 정책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 정부들도 경제성장 정책에 민주주의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90년대 말 외환위기로 나타났다. 그러자 정부는 반성보다는 위기극복이라는 명분으로 성장주의 정책의 연장선에서 더 드라이브를 걸었고,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환경의 변화에 적응했다.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와 부의 불평등 배분, 소외세력의 경제적 삶에 관한 내용이 배제돼 버렸다."


▲ 정기훈 기자

- 노조 조직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한때 한 자릿수로 내려가기도 했다. 게다가 유급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제도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시행 이후 노동운동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위기인가.

“한국의 노동운동은 두말할 필요 없이 위기다. 노동운동은 사용자의 대화 파트너이자 의사결정 참여주체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익을 대표하는 데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조직률 하락은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를 한눈에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다. 노동운동이 빈사상태에 빠져 있다.”

“노동운동 위기는 타임오프·복수노조 시행과 상관없다”

최 교수는 노동운동이 위기에 처한 원인 중 하나로 노동자 정치세력화 실패를 꼽았다.

“한국의 경제발전 수준과 조합원수 증가에 따라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반이 있었음에도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정당들을 볼 때 이 역시 완전히 실패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최 교수는 “(노동운동의 위기는) 타임오프나 복수노조 시행과는 상관없는 문제”라며 “조직률은 그 이전에 지금 상태로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러한 제도를 기업이 노조를 분열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정부의 노동정책이 노동현실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진보개혁세력이 정권교체를 한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한계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우선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진보개혁세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민주적 가치에서는 진보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부가 노동정책에서만큼은 보수세력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운영과 성장정책, 노동문제에 관한 한 재벌을 지원해서 성장을 주도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그 정당에는 노동자의 이익과 가치, 열정을 대변할 수 있는 채널과 세력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

최 교수는 정당체제 안에서 노동자세력이 대표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당을 통해 노동자세력이 대표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선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보면 거리가 있다. 현재의 정당구조로는 과거의 한계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와 소외세력·사회적 약자·서민으로 통칭되는 이들의 요구가 정당의 중심적 위치로 들어서야 한다.”

“노동자에 적대적인 이명박 정부는 최악”

- 이명박 정부의 노동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친기업적이고 반노동자적 정책을 공공연하게 펼쳐 왔다. 이명박 정부처럼 노동자들에게 적대적 정책을 취한 나쁜 정부는 내 기억에는 없다. 쌍용자동차 강제진압과 SJM 용역폭력은 정부에 의해 방조되다시피 했다. 노동정책에서 노동자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권위주의 때보다 더 나쁜 최악의 정권이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정권이다.”

- 차기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펴야 한다고 보는가.

“정규직-비정규직 구분은 2007년 노무현 정부하에서 비정규직법으로 확실히 제도화된 면이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나쁜 정책의 대표적 사례다. 당시 정부는 비정규직을 2년 이상 사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비정규직 보호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2년 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루폴(loophole·법의 허점)이 있었다. 기업들은 이를 마음 놓고 활용했다.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비정규직법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 정기훈 기자


비정규직법을 바라보는 최 교수의 시선은 냉정했다. 그는 “정부는 정책과 법이 현실에서 집행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은연중 기업을 편들고 노동자를 배제했다”며 “그러면 법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최우선 개혁과제는 비정규직 문제”

최 교수는 “연말 대선을 통해 개혁돼야 하는 제1의 과제는 비정규직 문제”라고 밝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이려면 노조가 조직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비정규직을 대표하는 노조가 별로 없다.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은 자기이익을 대표하고 보장하려는 노동운동이 돼 버렸다. 노조가 있어야 타협을 할 수 있다.”

-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대선 출마를 어떻게 보나.

“안철수 현상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안철수 현상은 기존의 정당, 특히 진보개혁적 야당이 실패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청년문제는 전 세계적 사회경제적·정치적 이슈임에도 우리나라 어떤 정당도 이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았다. 안철수 후보는 이를 사회경제적·정치적 이슈로 만든 최초의 인물이다.”

최 교수는 안철수 후보가 지난 대선 당시 문국현 전 창조한국당 대표와 다른 점으로 "한국사회의 근본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한번 생각해 봤다. 왜 이렇게 안철수 현상이 오래 지속될까.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적 문제와 노동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층 문제, 이것이 가져오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실존적 문제다. 정당이 제 기능을 했다면 안철수 현상은 정당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당이 제 기능했으면 안철수 현상 흡수됐을 것”

최 교수는 “안철수 후보가 혼자서 정당후보와 대등한 경쟁을 하는 현상은 그가 근본적 문제를 들고 나왔고 나름대로 그 내용을 채워 가고 있기 때문”이라며 “안철수 후보가 직접 대안이 되든가, 외부충격에 의해 민주통합당을 변화시키든가, 어떤 이유에서건 이를 부정적으로 봐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 민주통합당은 정치쇄신을 말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지도부가 목전의 정권교체라는 것을 절대명제로 설정해 당 쇄신은 뒤로 밀쳐놓고 강한 레토릭(수사)으로 이명박 정부를 공격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스스로 개혁을 못한다. 과거 잘못에 대한 성찰도 없고 대안도 보여 주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집권했을 때 이명박-박근혜보다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 이번 대선을 관통할 의제는 무엇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지난 총선을 보면 보편적 복지나 경제민주화, 반값등록금 등 슬로건과 레토릭은 화려했다. 그런데 총선을 거치면서 이슈들이 다 사라졌다. 실현가능한 정책대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출발은 노동문제가 돼야 한다. 무턱대고 경제민주화 복지, 재벌개혁을 논의할 게 아니라 노동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용 없는 야권단일화로는 이기기 어려워”

- 조만간 야권후보 단일화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바람직한 방안이 있다면.

“단일화가 절대명제가 돼서는 안 된다. 그러면 선거를 치를 수 있는 당의 정비나 쇄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식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정권교체를 왜 해야 하는지, 그 내용과 의미가 중요하다. 단일화 이전에 각 후보진영이 자기가 구체적으로 사회세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실현가능한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국민이 선택할 수 있도록 차별화된 메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무턱대고 단일화가 필요하다며 매일 여론조사를 하고 단일화 이슈로만 간다면 단일화가 되더라도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

- 문재인 후보가 책임총리제와 정당책임정치를 제시했는데.

“어떤 세력이 합쳐질 때 권력분점의 정치의 기술, 권력운영의 방식으로 실천해 보는 것이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하나의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

- 민주노총은 임원직선제로 내홍을 겪고 있다. 한국노총은 민주통합당과의 통합을 주도한 전 지도부가 물러났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번 대선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보나.

“노동운동은 이번 대선에서 노동자들의 '표 블록'을 만들지 못했다.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열된 상태로는 노동운동의 통일된 요구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 정기훈 기자

“현실적인 노동자 삶의 문제에 천착해 달라”

그러면서 최 교수는 민주노총 임원직선제에 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내셔널센터 노동운동 지도자를 직선제로 선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민주주의를 선거만능주의로 이해하는 방식은 곤란하다”고 밝혔다.

- <매일노동뉴스>가 창립 20주년 및 지령 5천호를 맞았다. 조언을 해 달라.

“노동운동에 낱낱이 흩어진 의사들을 결집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면서 비판하고, 가이드하는 매일노동뉴스가 돼 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노동운동이 발전할 수 있다. 이상주의적 또는 낭만주의적 구호보다는 현실적으로 노동자 삶의 문제를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느냐에 천착해 줬으면 좋겠다.”

글=연윤정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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