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보통 사람들의 판단을 불신하면서 전문가가 정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살아 있는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로버트 달(Robert Dahl)은 '전문가주의'라고 불리는 이런 견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라 생각했고, 보통 사람들의 참여와 판단이 공익을 위해 더 우월함을 입증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돌아보더라도, 전문가주의의 강력한 영향력은 금방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지금의 한국정치야말로 전문가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대중 참여의 기반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정당들마다 전문가라는 이유로 공천을 주는 사례가 급격히 늘었다. 대선캠프들도 전문가 영입경쟁에 내몰려 있고, 전문가들이 정책을 만든다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일로 분주하다. 집권 뒤에도 정책은 정치인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맡길 것이며, 대통령의 역할은 행정적 대표기능으로 제한할 것이라는 주장도 들린다.

전문가가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이익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실현할 도덕성을 갖추고 있으며, 모두에 대해 평등한 배려의 원칙을 완전하게 준수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면, 전문가에 의존하는 정치가 시끄러운 민주정치보다 우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현실이 될 수 없다. 전문가란 누구일까. 그들은 ‘절반의 인민주권’의 저자 샤츠슈나이더가 말하듯 "어느 한 분야에 관해서는 전부를 알고자 하면서도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기로 작심한 사람들"이다. 대개는 집안에서 “자기 일 이외는 도대체가 할 줄 아는 게 없어”라는 핀잔을 자주 듣는 존재들이다. 편협하게 많이 아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잘못된 신념의 노예가 되기 쉽다. 미국의 수학자 케메니(J. C. Kemeny)는 원자력 문제에 관한 대통령 자문위원장 직을 마친 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나는 계속해서 종교적 믿음 내지 때로 광신적인 믿음을 가진 과학자들과 싸웠다. 그들은 단지 약간의 가능성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틀림없다고 말함으로써 편견 없는 조언자가 아니라 편견의 옹호자가 됐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전문가들의 예측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검증해 본 것으로 유명한 암스트롱(J. S. Armstrong) 교수 역시 “놀랍게도 나는 전문가들이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연구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도덕적 능력의 면에서도 전문가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했던 토마스 제퍼슨도 그랬다.

“도덕적 사건을 농부와 교수에게 말해 보라. 농부는 교수만큼이나 혹은 때로 교수보다 더 훌륭하게 판단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문가와 달리 농부는 인위적인 규칙에 의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육군장관을 지낸 정치가 클레망소는 “전쟁은 너무 중요해서 장군들에게 맡겨 둘 수가 없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는데, 그의 말을 변용한다면 “국가 정책은 너무나 중요해서 전문가들에게 맡겨 둘 수가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시민참여의 효과에 기초를 둔 체제이지, 통치자의 전문적 자질에 기초를 둔 체제가 아니다. 정치 참여를 통해 소수만이 아니라 다수가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시민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이 그것은 소수의 탁월함에 의존하는 공적 결정보다 다수에 의한 결정이 공동체에 더 유익하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민주주의에서 전문가의 정치적 역할은 일반 시민의 역할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집합적 지혜를 뒷받침하는 데 기여할 때 가치를 갖는다.

어쩌면 지금의 문제는, 전문가를 우대하는 듯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들의 전문적 식견을 펼칠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닌 데 있는지도 모른다. 전문가라는 이름을 빌려 대선후보들마다 신뢰성을 높이려는 전략적 고려에 근거한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문제이든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 부화뇌동하는 전문가들이 문제이든, "전문가 타령"이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지는 동안 민주주의의 대중적 기초는 점점 더 깊이 해체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parsh03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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