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86년 겨울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과 87년 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10 항쟁을 예고했다.

87년 6월10일을 하루 앞둔 날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군이 학교 앞에서 열린 연세인 총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하던 이한열은 이날 1천여명의 학생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연세대 교문 쪽으로 행진했다. 교문 앞에 다다르자 전경과 백골단이 가로막고 도열해 있었다. 이한열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 있었다. 대치상태는 곧 허물어졌다. 최루탄이 난사됐고 전경과 시위대 사이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교내로 후퇴하는 순간 이한열이 ‘SY44’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그를 부축하고 인근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이한열은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의 회고)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촬영한 이는 로이터통신 사진기자였던 정태원(72)씨다. 정씨의 카메라에 잡힌 이한열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동료 학생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부축한 이는 같은 연세대 2학년 이종창군(도서관학과)이었다. 이씨가 이한열을 부축하는 사진은 이후 “한열이를 살려 내라”는 걸개그림으로 만들어져 8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상징이 됐다.

24년이 지난 지난해 이종창씨는 모교 연세대의 직원노조 위원장이 됐다.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 전공을 살려 ‘도서관 운동’에 전념했다. 이씨는 90년대 초 신림동 달동네에서 난곡주민도서관에서 일했다. 이후 도서관 직원으로 모교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도 “당시 학생운동했던 걸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진을 찍었던 로이터통신 사진기자였던 정씨는 이한열 사진의 저작권료를 최근 이한열기념사업회에 기부했다. 87년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의 병실을 찾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는 그때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씨를 만나 지금까지 함께 노구를 이끌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를 이끌면서 민주화운동 현장을 누비고 있다.

이한열을 분노케 했던 박종철 열사의 죽음 뒤에도 또 한 사람이 있다. 박종철군이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지키려했던 선배, 박종운은 한나라당에 들어가 경기도당 서부지역 총괄본부장이란 직함을 들고 다녔다.

20년의 시간은 많은 사람들을 변하게 했지만, 변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은 더 많다. 엊그제 경기도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 앞에서 이한열열사기념사업회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씨도 함께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87년 6월 항쟁 당시 최루탄을 맞고 피 흘린 채 동료(이종창)의 부축을 받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잔인하다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대체할 것을 최근 권고한 데 대해 항의방문한 자리였다. 배은심씨는 “이한열을 두 번 죽이지 마라”는 구호를 적은 작은 펼침막을 들고 있었다.

이렇게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부당한 정부기관의 담장을 맨손으로 부여잡고 우는 사람들이 있다. 언론은 이들이 남은 노년의 생을 편히 보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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