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아직도 2003년 10월26일을 기억한다. 탑골공원에서 첫 번째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가 열리던 날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이었던 이용석 열사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도로로 뛰쳐나갔다. 비정규직이라는 현실이 억울했고 목숨을 걸고 비정규직의 고통을 알려야 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노만 터뜨린 것은 아니다. 그 이후 많은 비정규직들이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제는 더 이상 숨죽이고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이 이용석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해마다 10월26일이 있는 토요일에 전국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모여서 열사를 기억하며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꾼다.

2012년 10월27일이 다가온다.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를 위해 모든 비정규직들이 함께 행진하는 날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하고 차별로 고통 받고, 내 삶의 미래를 꿈꿀 수 없었던 이들이 모두 모여 “우리에게는 권리가 있다”고 외치는 날이다. 노동자는 일회용품이 아니며, 기업이 원할 때 마음대로 줄이거나 늘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모든 노동자는 함부로 해고되거나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생활할 수 있는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단결하고 투쟁을 해서 자신의 노동조건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이 모든 권리가 함부로 제한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땅에서 권리를 찾기를 원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모이는 것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비정규 노동자들은 목숨을 건 단식·고공농성·점거 등 극한의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이 얼마나 잘못된 고용형태인지를 알려 왔다. 저임금에 항의하는 청소노동자들은 연말 재계약시기에 용역업체가 통째로 날아가는 경험을 했다. 또 다른 비정규 노동자는 월차를 쓰겠다고 했다가 식칼테러를 당했고, 용역깡패들의 폭력과 거액의 손해배상청구에 시달리기도 했다. 사용자들은 불법파견이니까 정규직화하라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징계해고를 남발했다. 그러나 비정규 노동자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쌍용자동차의 한 비정규 노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는 일을 이제는 멈추고 싶어서였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그렇게 투쟁해 왔다.

2012년 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는 지금까지 비정규 노동자들이 고군분투해 왔던 현실을 넘어서 보고자 한다. 비정규직이라는 자신의 현실을 애써 부인하고, 때로는 이 일자리는 스쳐 지나가는 일자리에 불과하다고 위안하거나, 이런 일자리라도 있는 게 어디냐며 순응하거나, 아니면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안주하는 많은 불안정한 노동자들…. 그들에게 “이제는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나서자”고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해고의 두려움, ‘나서면 나만 손해’라는 공포를 이제는 벗어던지고 더 많은 이들에게 권리를 외쳐 보자고 제안하는 자리다. 비록 정규직이더라도 여전히 고용이 불안정하고 경쟁과 장시간 노동으로 허덕이며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이제는 권리를 찾고 ‘함께 살자’고 이야기하는 자리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우리 노동자들은 지금의 삶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기업들은 입만 열면 글로벌 경제위기라고 말한다. 언제 다시 구조조정의 광풍이 불어닥칠지 모른다.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에 시달려도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침묵하면서 살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불안과 그칠 줄 모르는 기업의 탐욕이 너무 크다. 그 탐욕은 노동하는 이들의 삶을 완전하게 파괴하고 권리를 모두 빼앗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제는 멈추게 해야 한다. 더 이상 노동자의 삶이 하찮게 여겨지고 노동자의 권리가 휴지처럼 여겨지지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10월27일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행진의 날은 우리를 갈라 놓고 경쟁시키고 생존의 위협에 공포를 느껴 침묵하게 만드는 지금의 사회를 넘어,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이들이 모이는 날이다.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기업을 규제함으로써 일하는 모든 이들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날이다.

10월27일 오후 5시 서울역. 이날 모든 이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지금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건, 아니면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건, 아니면 어느 정도 삶이 보장되더라도 이런 경쟁과 차별의 사회에서는 결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고 믿는 이들 모두가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모두가 모여 내 권리만이 아니라 모두의 권리를 위해 함께 외쳤으면 좋겠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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