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계절과 정치판의 체온은 정반대인가. 한쪽은 차가워지는데 다른 한쪽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한때는 정책대결을 한다더니 이제는 네거티브 선동정치로 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묻힌 거짓을 캐내서 진실을 밝히는 일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음모적인 색깔칠이 아니라면 선동이란 자기 주장을 포장해 선전함으로써 민심을 제 편으로 돌리기 위한, 어쩌면 현실정치의 핵심 기법인데 이를 부정하면 정치를 그만두라는 얘기나 다를 바 없다. 예컨대 역사인식의 기준을 하루아침에 정반대로 바꾸고 이제 미래만을 얘기하자는 것은 오래지 않아 또다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관련된 문제를 들춰 진정성을 확인하려는 것으로 당연한 순서다. 또 근거 없는 주장에 목소리만 크다고 그냥 넘어가는 우민 우중의 시대는 이미 아니라고 보아 지나치게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무성한 논의를 막을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삶에 바빠 지친 민초들로서는 이때가 가장 흥미롭고 관심을 많이 가질 수 있는 기회이며 이를 통해 정치의식이 높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선후보들의 공약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거의 매일 발표되고 있다. 한데 그 공약들 가운데 노동문제 해결에 관한 비전과 정책이 유난히 빈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잘못된 착시일까. 노동문제 관련 공약은 대개 두 가지로 집약돼 있는 듯하다. 노동일반은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파견근로자 보호와 비정규직 대폭 감축으로 분류된다. 일자리 문제에 대해서는 일자리 중심의 국정운영을 내세우면서도 산업진흥 지원책이나 창업자금 지원 같은 고용확대시책을 나열해 놓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통해 대기업·중소기업을 상생하도록 해 새 일자리를 많이 만들겠다는 포괄적인 혁신경제 포부도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문제의 한 축인 노사관계 발전에 관한 비전과 정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선후보들이 경제성장 신화의 덫에 걸린 결과는 아닐까. 곧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 해결의 원천이라는 성장 제일주의 또는 선성장 후분배론의 틀에 매여 있는 경우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일자리 창출이나 복지확충을 얘기할 수는 있지만 노사관계 발전을 힘 있게 내놓기는 어렵다. 물론 경제정책의 우선순위 다툼에서 성장과 분배의 관계는 오랜 쟁점이었다. 지나친 성장일변도 정책이 낳은 심각한 폐해 때문에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정책결정의 초점이 돼 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경우 선성장 후분배의 철학은 완강하게 정책의 근저를 지배해 왔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후예인 전두환·노태우 정권은 두말할 것이 없지만 그를 타도대상으로 삼아 왔던 민주화 이행기의 김영삼 정권이나 스스로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라고 자부했던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성장중심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배경은 경제위기 극복이었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 시대 성장신화론이 낳은 국민경제의 질곡, 곧 해외의존과 사회경제적 불균형은 극복·치유되기보다는 유지되거나 더욱 악화돼 오늘에 이른 것이다. 물론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진보진영이 현실적인 힘을 갖고 대응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정책의 기조는 정치지도자의 철학과는 상관없이 비즈니스 프렌들리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노사관계의 민주적 발전은 정책선택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아울러 노동운동은 자제돼야 하고 산업별노조의 건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과 같은 노동운동의 기조는 완강하게 거부된다. 그리고 기업별노조 체계하의 경제주의·조합주의·협조주의가 노사상생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운동의 지향점으로 강조되는 상황이 연출되게 된다.

노사관계 발전논의가 대선 과정에서 소홀히 되는 이유로 관련 쟁점이 총선거에서 이미 표출됐다는 사실과 함께 쟁점화할 경우 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해타산을 들 수 있다. 노동자·대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중소 영세기업 노동자가 노동운동에서 대부분 소외돼 있는 상황에서 노동운동진영이 주장하는 노사관계 개혁론(타임오프 폐지와 교섭창구 단일화 폐지 등)에 동의하는 경우 그것은 노동귀족을 편드는 반사회적 인자로 낙인찍혀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결국은 표를 잃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은 노동배제적인 기조를 견지하고 있고 새로운 노사관계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구실을 내세울 수 있다. 하지만 노동운동 세력을 끌어안아야 하는 야당의 처지에서는 십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물론 노사관계 플랜이 나올 수 있는 계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성장우선론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 한계가 되풀이되리라는 것은 역사가 보여 준 대로다. 벌써부터 강조되고 있는 경제위기 전망은 이런 우려를 더욱 짙게 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노동운동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기운을 되찾아야 할 이유를 대선과정은 다시 확인해 주고 있는 셈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leewb45@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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