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90년판 중등 국사교과서에는 조선시대 결혼한 여자가 예복 차림을 할 때 머리에 얹던 큰머리인 어여머리를 하고 활머리를 얹힌 정장한 궁녀가 명성황후라며 등장했다. 그러나 진위를 둘러싼 논란 끝에 97년 개정판에서 퇴장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와 고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 사이에는 이 사진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말을 내진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왕후만 비녀 두 개를 꽂을 수 있었다는 이 교수의 주장과 예복 차림의 궁녀가 맞다는 이 고문의 주장이 팽팽했다. 국사학자 이태진 교수는 학자로서 여러 차례 역사적 사실을 밝혀냈다.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았던 시절에는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결정적 근거가 된 반출경위 문건을 찾아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한 건물에 5천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중 우리 국립도서관에 소장할 340여권을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간다”고 적은 편지를 찾아낸 이가 바로 이태진 교수였다. 이 교수 덕분에 20년의 노력 끝에 프랑스로부터 도서반환이라는 결실을 얻었다.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찾으려는 이 교수는 1910년 한일합방이 순종황제의 서명 없이 불법으로 자행됐다는 근거도 찾아냈다. 이 교수는 일본 도쿄 국립공문서관에서 이를 입증할 ‘일본측 한일병합 조사’ 등 여러 불법 증거물을 찾아 발표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2003년 하버드 대학에서 사상 첫 한국어 강의를 하고 2004년 동경대학에서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태진 교수는 정년퇴직할 때까지 32년 동안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자리를 지켰던 충실한 학자였다. 그런 그가 2010년 9월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됐을 때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장이 되고서도 2033년까지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하기 위해 예산을 확보하고 꾸준히 연구진을 독려하는 모습은 한결같았다.

그런 나이 칠십의 성실한 노학자가 정치인들에게 험한 말을 들어야 했다. 지난 9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역사관을 두고 논란의 중심이 됐다. 박혜자 민주통합당 의원에게 “5·16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는 독재도 좀 필요했다”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 교수는 즉시 사과하고 발언을 취소했지만 민주통합당 의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이 교수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89년에 펴낸 <한국사회사연구>다. 이 책은 법관들이 뽑은 최고의 책에도 뽑힐 만큼 탄탄한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농업기술 발달과 사회변동’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시각도 건강했다. “농업기술의 발달이 바로 성리학 정착의 기반이 됐다”는 이 교수의 주장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토대가 상부를 규정한다’는 전형적 유물론이다. 이 교수는 이 책에서 당쟁을 종래 식민사관처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붕당정치라 해 새롭게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성리학을 당시대에 진일보한 사유체제로 인정했다. 이 교수의 이 책은 식민사관을 탈피한 것을 넘어 경제적 토대가 철학적 사유를 규정했다는 방식이라 더욱 각광을 받았다. 이 교수는 조선시대 향촌공동체인 향도가 후기에는 노동조직인 두레와 장례조직인 상두군으로 분화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한국사회사연구>는 역사책이라기보다는 경제사책에 더 가깝다.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영일만에서 자란 이 교수의 나고 자란 곳이 많이 걸린다. 아직도 나고 자란 곳이 문제가 되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가 더 아쉽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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