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가끔 운동권 출신 정치인과 대화할 기회를 갖는다. 흔히 ‘386 정치인’ 내지 ‘486 정치인’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에게 운동의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책임 윤리”라고 불리는 막스 베버의 개념을 자주 인용한다. 정치는 냉혹한 현실이고 따라서 신념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베버가 말했듯 정치는 신념 윤리의 세계가 아닌 책임 윤리의 세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들에서 정치는 운동과는 단절해야 하는 어떤 것이 됐고, 정치가로서의 유능함은 오히려 운동적이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이 됐다. 그들이 말하듯, 운동과 정치는 다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다른 것은 실천론에 관한 문제일 뿐, 신념이 달라질 수는 없다고 본다. 어린 시절 부모 형제의 희생 덕분에 대학에 가게 되고, 사회의 부조리함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고 그 뒤 사회운동을 하면서 자신이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들의 삶이 늘 같은 모양새로 있는데, 운동할 때와 정치할 때 자신의 신념이나 자세가 다르다면 그건 어딘가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진보파의 경우 현실의 정치에서는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스스로를 견뎌 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신념 내지 대의에 대한 헌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경험해 보니까 역시 현실 정치는 다르다”는 말이 신념과 열정의 부재를 변명하는 알리바이로 사용될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든다.

나 역시 진보정치에 나선 사람들에게 '신념을 앞세우는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고 운동과 정치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 말하지만, 그들과 나의 이해방법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다. 그들이 즐겨 막스 베버를 인용하지만, 그것 역시 오독이라고 본다. 베버에게 신념 윤리는 좋은 정치의 출발점이다. 신념에 기초를 둔 소명의식 내지 대의에 대한 헌신이 없는 정치가를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점, 신념 윤리와는 별도로 책임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에게 책임 윤리란 신념 윤리에 따른 목표를 현실에서 실현할 때 가져야 할 윤리를 말한다. 다시 말해 신념에 상응하는 결과를 성취하거나 그 가능성을 확대하는 차원에서의 윤리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책임 윤리가 신념 윤리의 연장일 수 없다는 것, 예컨대 초심과 진심, 진정성만으로 정치의 세계에서 가능성을 개척하기는 어렵다는 데 있다. 정치적 실천을 함에 있어 때로 전략적 계산도 해야 하고 질투와 편견을 동원하는 계략도 필요할 때가 있고, 나아가서는 강제와 폭력도 필요한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자신의 도덕적 선의와 충돌하는 행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법도 불사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따라서 제대로 된 정치가라면 늘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고민하는 존재이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의 윤리적 기준은 신념 윤리가 아니라 책임 윤리라고 말하고, 신념의 토대 없이 정치적 유능함만을 추구하는 정치가라면 그런 '도덕적 비애감'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베버는 그런 정치가를 “천박한 권력정치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고민하고 도덕적 비애감 속에서 몸부림치더라도, 그 때문에 자신의 내면이 무너지지 않도록 스스로 단련하고,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속에서 성숙한 인간의 정치가가 출현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1단계 진보정치의 실험은 종결됐다. 새롭게 출발할 수밖에 없게 됐고, 그런 점에서 이전과는 달라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자꾸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점차 신념의 힘은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뻔히 들여다보이는 계산에만 밝은 유형의 행태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진보다운 기백이 없다는 점이다. 당연히 인간으로서도 하찮게 보인다. 신념을 가진 진보정치가로서 도덕적 비애감을 뚫고 단단한 내면과 인격의 힘을 보여 주는 사람은 어디 없을까.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parsh0305@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