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민족의 명절 추석에 모처럼 고달픈 일과를 내려놓고 가족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은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더욱이 노사분쟁 해결에 대한 간절한 기대는 당사자만의 것은 아닐 터, 한가위를 전후해 모처럼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금속노조 SJM지회 조합원들이 철문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회사로 들어갔고, 보건의료노조 이화의료원지부 파업이 노사합의로 종결됐다. 직장폐쇄 후 62일, 파업 25일 만의 일이다. 추석을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주위의 안타까운 주문이 실현된 셈이다.

이렇게 노사관계가 파란을 겪다가도 다시 안정을 찾는 것이 순리이련만 우리의 현실은 격랑의 연속이다. 노사분규 건수가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립 갈등을 넘어 파국 직전에 놓여 있는 장기 분쟁사업장이 수없이 널려 있는 데다, 멀쩡했던 노동조합이 갑자기 깨져 나가는 일이 자주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노무법인이 거액을 받고 자문이라는 이름으로 노조파괴를 거침없이 행해 왔다는 점이다.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 영업자료로 낸 ‘노사관계안정화 컨설팅 제안서’라는 문서에 의하면 백수십 개의 회사가 컨설팅, 단체교섭 수임, 자문을 받거나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그 속에는 굴지의 대기업들이 들어 있고, 노사갈등이 심했던 곳이 대부분이다. 비정규직과 특수고용노동자 문제로 심각했던 곳도 여럿 있다.

이 노무법인은 지난 7년 동안 14개의 노조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금속이 7곳, 병원이 4곳이다. 노조파괴의 형태는 대량징계와 집행부 교체, 조합원 감소를 통한 조직의 무력화, 무파업 또는 노사화합 선언을 통한 노사협조주의 조직 변신, 산별노조에서 기업별노조로의 조직형태 전환 등으로 분류된다. 시기별로 보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이후가 대부분이다. 노조파괴 매뉴얼은 법의 허점을 활용해 매우 치밀하게 짜여 있다. 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가면 회사는 직장폐쇄를 단행하고 외부용역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내던진다. 파업을 풀고 직장복귀를 통보해도 회사는 들은 척도 않고 선별해서 퇴출시킨다. 노조를 탈퇴한다거나 파업에는 일체 참가하지 않는다는 등의 각서가 요구되고 반노조 교육이 강제된다. 노조간부의 대량징계와 노조탈퇴 공세에 이어 새 노조가 결성된다. 회사는 온갖 교묘한 수단을 동원해 새 노조를 돕는다. 그렇게 해서 기존의 노조는 소수노조로 전락하고 새 노조가 대세를 장악하고 단체교섭권을 행사한다.

이 같은 노조파괴공작은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하면 곧바로 노동조합이 깨질 수도 있다는 잔혹한 두려움을 던져 준다. 그로부터 노동자들은 자신이 속한 노동조합의 강력한 투쟁에 참여하기를 꺼리게 되고 고용불안과 정리해고의 공포에 찌든 노동자들은 더욱 위축된다. 아울러 2008년 이후 파괴대상은 대부분 금속과 병원 사업장이라는 점에서 산별노조 약화와 직결돼 있다. 최근 파업을 벌였던 이화의료원도 보건의료노조 소속조직이다. 말하자면 한 노무법인이 벌인 노조파괴공작은 노동운동의 재생을 위해 산별노조 건설을 추진하는 노동운동과 정면에서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꼴이다.

노조탄압이나 파괴수법은 진화하기 마련이다. 과거에는 자본의 막강한 힘에 의한 방식, 지본이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하거나 결합한 방식, 국가권력이 폭력적으로 앞장서는 방식이었던 데 비해 이번에는 용역회사와 노무법인이 전면에 나선 점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이번 사태를 일개 용역회사와 노무법인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관련 회사와 경찰, 정부부처의 발뺌은 국회 청문회 과정 곳곳에서 어두운 정체를 드러냈다. 노사관계 선진화니, 노사상생 공존이니 말로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노동기본권의 존중과 그에 따른 노사대등의 파트너십을 실천적으로 진전시키는 일이 노사 당사자에게 강조돼야 하고 준엄한 심판과 제재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노동운동에는 책임이 없는가. 먼저 노조파괴 공세는 지금의 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만의 것이라는 광범한 사회적 비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의 각성과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민주노조가 지닌 조직력의 취약성을 시급히 치유하라는 메시지를 던져 준다. 어떤 노무사가 민주노조를 한번 찔러 봤더니 쑥 들어가더라고 놀랐다는 얘기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지금까지 무력화한 조직 대부분이 강한 파업투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시켜 왔던 사업장들이라는 점에서 현장상태를 되돌아보고 조직확대 강화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복수노조 제도가 노조파괴와 무력화에 활용되고 있다는 점 역시 심각하게 돌아볼 일이다. 애초 복수노조는 노조가 힘이 있을 때 도입했어야 했지만 여러 차례 유예를 거듭하는 사이 노조 힘은 극도로 쇠잔해졌고 이때 들어선 복수노조는 양날의 칼이 돼 노조 스스로의 힘을 분열, 약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 스스로 지키고 키워야 하는 것, 법·제도의 개선과 함께 자신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함을 노조파괴 사태는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leewb45@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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