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에 있는 기업은행 지점에서 근무하는 김성윤(가명·37) 과장은 퇴근 후 집 주변에 있는 체력단련장에 다닌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충분히 쉬니 아침병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침마다 목이 뻐근하면서 나른해지는 증상이 없어진 것이다. 머리가 맑아지고, 근육에 긴장감이 남아 있으니 회사 업무에도 의욕이 생긴단다. 김 과장에게 이러한 변화가 찾아온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입행 후 김 과장은 밤 10시를 훌쩍 넘기는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김 과장은 “특별한 병은 없었지만 지속적인 야근 때문에 몸이 늘 피곤하고 힘이 없었다”며 "평일날 데이트는 꿈도 못꾸고, 주말에는 잠자기 바빴다"고 말했다.

노사가 이런 폐단을 없애자는데 합의했고, 근무시간을 정상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노사 협상 끝에 나온 방안은 '정상근무 시간 이후 영업점 전산시스템을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김 과장은 이러한 조치로 매일 오후 7시가 되면 '칼처럼' 퇴근하게 됐다. 지난해 9월부터다. 김 과장은 “이제는 퇴근 후 체력단련장도 가고, 집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니 몸에서 힘이 난다"며 "여태 결혼을 못했는데 시간 여유가 생긴 만큼 짝을 찾고 싶다"며 웃었다.

은행권에서 장시간 노동이 관행처럼 된 것은 외환위기 이후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이 빈번해지면서 명예퇴직과 정리해고가 상시적으로 이뤄졌고, 떠나간 동료들의 업무는 살아남은 자의 몫이 됐다. 그들의 노동강도는 종전보다 두 배 이상 강화됐다. 장시간 근무에 불만이 높았지만 살아남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여기에 은행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업무량도 폭증했다. 은행원들의 생존 스트레스는 외환위기 이전보다 훨씬 극심해졌다. 구조조정과 감원을 막는 데 주력하던 은행권 노조들은 이런 장시간 근무와 경쟁시스템을 개선하는 사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영업시간 단축운동이 벌어졌고, 은행별로 사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금융노조는 장시간 노동문제를 개선하는 요구안을 제시한 상태다. <매일노동뉴스>가 은행권의 장시간 노동 실태를 알아보고, 근무시간을 줄이는 데 앞장서 온 기업은행 노사의 사례를 살펴봤다.

베일에 가린 금융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은행권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고객들은 오후 4시에 은행 문이 내려지면 은행원들도 퇴근하는 것으로 안다. 은행 문이 닫히고 난 후 시작되는 은행원들의 바쁜 업무를 알지 못한다. 그들이 언제 출근하고 퇴근하는 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타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액 연봉자라고 알려진 탓에 은행원의 장시간 노동의 심각성은 희석되고 만다.

금융노조가 한국노동연구원과 공동으로 지난해 19개 사업장 5천141명의 조합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놀라울 정도다. 안정적인 화이트 칼라계층이라는 은행원이 제대로 쉴 시간도 없이 과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 이상(64.6%)이 오전 8시 이전에 출근한다고 답했고, 43.1%는 오후 8시 이후 퇴근한다고 했다. 이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1시간이 넘었다. 장시간 노동이 이직·퇴직 고려의 주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한 응답자는 59%에 달했다.

장시간 노동은 은행권 노동자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는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 은행노조의 집계에 따르면 재직 중 사망자가 2000년 이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2006년 이후 5년간 연평균 3.8명이 재직 중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재직 중 사망하는 이들이 드물었는데 이런 추세가 뒤집어 진 것이다. 사무전문직종에서 최근 급증하고 있는 뇌심혈관질환에 따른 사망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질환의 원인으로는 대개 장시간 노동과 직무스트레스 강화를 꼽는다.

유주선 금융노조 부위원장은 “대형 은행의 경우 과거 한 해 10명 이상이 재직 중 사망한 경우도 있다”며 “정확한 사인은 분석해 봐야 하겠지만 금융권에 만연한 장시간 노동이 노동자들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과로사로 이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근무시간 정상화 특별위원회' 설치했으나…

때문에 금융노조와 산하 지부들은 경쟁시스템 개선과 근무시간 줄이기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얻어 노동시간을 줄인 곳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기업은행의 경우 선언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근무시간을 줄인 사례로 꼽힌다. 기업은행지부가 노동시간 줄이기에 나선 것은 지난 2007년부터다. 당시 기업은행지부 조합원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무려 12시간48분에 달했다. 영업점 전산시스템이 멈추는 것을 기준으로 한 퇴근시간도 밤 10시에 이르렀다. 조합원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에 당시 기업은행지부 집행부는 사측을 설득해 ‘근무시간 정상화 노사공동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업무보고 시스템을 개선하고 전 직원의 퇴근문화 개선운동을 벌였다. 기업은행 노사가 자발적으로 벌인 근무시간 단축운동은 변화의 발판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이후 금융노조와 전국은행연합회는 2008년 산별교섭을 통해 근무시간 단축 논의를 벌였다. 그 결과, 영업시간 시작을 30분 앞당겨 오전 9시에 시작하고, 폐점시간도 오후 4시로 조정했다. 은행원들의 폐점 후 장시간 근무 관행을 개선하자는 취지였다. 영업시간을 조정하면 퇴근도 빨라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되레 역효과가 나타났다. 은행원들의 출근시간만 빨라졌을 뿐 퇴근시간은 종전 그대로였던 것이다. 은행 간의 치열한 경쟁, 폭주하는 업무량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영업시간만 조정했기 때문이다.

기업은행 노사도 2009년 금융노사의 합의에 따라 영업시간을 조정했다. 또 폐점 후 오후 7시에 영업점 전산망을 중단하되 경영평가에 이를 반영하는 지침을 각 영업점에 내렸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영업점마다 천차만별이었고, 지침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았다. 근무시간 단축 논의를 벌였던 은행장도 마음이 변했다. 급기야 윤영로 전 은행장은 지난 2010년 1월 근무시간 정상화 노사공동 특별위원회를 해체했다.

시행착오 끝에 근무시간 정상화 발판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데 앞장 선 것은 2010년 1월 기업은행지부 신임집행부를 이끌었던 유택윤 위원장이었다. 유 위원장은 당선되자 마자 특별위원회 복원 및 근무시간 정상화를 내걸고 농성을 벌였다. 은행측은 농성 24일 만에 지부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 해 10월에는 가정의 날 목표 퇴근시간이 오후 7시에서 30분 앞당겨진 6시30분으로 정해졌다. 또 직원들의 퇴근시간을 해당 부서·영업점의 경영평가와 연동해 운영하는 종전 제도를 보완했다.

기업은행지부는 2011년에 자사 출신인 조준희 기업은행장이 취임하면서 근무시간 정상화에 박차를 가했다. 노사는‘8시간 노동제’ 추진을 선포하고 관련 제도를 개선했다. 퇴근시간에 맞춰 영업점 전산망을 중단하는 조치를 보완하기 위해 부점장 이상 상급자가 직원보다 먼저 퇴근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를 실천하는 영업점에는 경영평가 점수를 후하게 주기로 합의했다. 지부에 따르면 현재 기업은행은 상·하반기 2차례에 나눠 경영평가 총점(1천점) 중 3%를 근무시간 정상화에 할애하고 있다. 여러 평가 항목 중 비중이 가장 높고, 기본 배점이 없어 실질적인 경영평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업점 전산망 차단 후 계속 일하는 ‘꼼수’를 차단하기 위해 오후 7시20분 이후 영업점이 경비업체로부터 봉쇄되면 퇴근시간을 자정으로 간주해 평가에 불이익을 받도록 했다. 기업은행 노사는 근무시간 정상화 실적이 저조한 영업점을 가려내 보고서 제출 및 교육 등으로 압박하고 있다. 지난해 68개 근무시간 정상화 부진 영업점 중 46개가 1차 간담회 후 평균 퇴근시간을 1시간 이상 단축했다. 이에 따라 2010년 오후 7시57분으로 집계된 영업점 최종 전산망 차단시간이 2012년 3월 현재 오후 7시1분으로 1시간 가량이 줄었다.

근무시간 단축 바람에 퇴근시간 고정도 '눈길'

기업은행지부 외에도 다수의 금융노조 소속 지부들이 조합원들의 근무시간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KB국민은행지부는 지난달 말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경영성과 측정지표인 KPI(key performance index)에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항목을 추가했다. 핵심은 조합원들의 조기퇴근을 활성화하고 휴일근무를 차단해 전체적인 노동시간을 줄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부는 기존의 권장 사항이었던 ‘가족 사랑의 날(매주 수·금 조기퇴근)’을 매달 1회에 한정해 지역본부와 사업그룹의 승인을 통해서만 예외를 인정하도록 했다. 이를 어길 경우 부서·영업점의 경영평가 점수를 하향 조정하기로 했다. 주말근무에 대해서도 같은 룰이 적용된다.

SC제일은행지부도 오는 10월 초부터 전산망 차단제도를 운영할 예정이다. 매주 2차례 조기퇴근 장려일에 맞춰 오후 6시30분 이후 전산망을 차단하는 것이 골자다. 지부는 우선 일정 기간 시범운영한 뒤 운영일 확대와 경영평가와의 연동방안 등을 검토할 예정이다.

노사협의회를 통해 퇴근시간을 아예 못박은 사업장도 있다. 신용보증기금지부는 지난 7월부터 오후 7시 퇴근을 의무화하고 있다. 야근의 횟수는 영업점별로 주 1회, 연간 20회를 넘지 못하도록 하되 제도 운영의 초창기인 점을 감안해 올해 12월까지에 한해 총 20회의 야근을 허용하기로 했다. 지부에 따르면 이로 인해 제도 시행 이전 밤 10시를 넘던 평균 퇴근시간이 약 3시간 이상 줄었다.

백정일 신용보증기금지부 위원장은 “근로기준법으로 정하고 있는 주당 근무시간 등을 감안하면 진작에 이뤄졌어야 할 조치”라며 “법적인 투쟁을 각오하고 나선다면 어느 사업장에서라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노조는 현재 진행 중인 산별 임단협 교섭에서 '기업은행지부 모델'인 전산망 차단제도와 경영평가의 연동방식을 타 은행에도 적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 영업시간도 재조정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당겨진 30분 개점시간을 종전과 같이 오전 9시30분으로 하되 폐점시간도 오후 4시30분으로 재조정하는 방안이다. 퇴근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전산망 차단제도를 보완하자는 요구다. 이에 따라 대형은행 지부를 중심으로 불고 있는 근무시간 정상화(또는 단축) 바람이 은행권의 고질적인 장시간 근무 관행을 바꿀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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