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정기훈 기자

세계은행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 39개국 중 33개국이 하나 이상의 자유무역협정(FTA)에 가입돼 있다. 신자유주의의 총아로 간주되는 FTA는 이들 국가에 경제성장과 번영을 가져다줬을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전문가 후앙 칼데론(Juan Calderon)은 “자유무역협정이 라틴아메리카의 빈부격차의 심화와 문화 종속, 공공서비스 기반 붕괴를 몰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은 무능한 정부에 대한 비판보다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며 “진보진영 역시 작은 차이를 극복하며 통일전선을 유지하는 속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후앙 칼데론과 박승흡 매일노동뉴스 회장이 지난 20일 오전 서울 서교동의 한 커피숍에서 한 시간여에 걸쳐 ‘신자유주의와 민중 생존권, 진보진영의 선택’이라는 주제를 놓고 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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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흡 :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로 밀려든 지 오래다. 일국적 경제체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주권은 어떤 의미를 갖나. 또 경제주권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후앙 칼데론 : 경제주권을 이야기할 때는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해야 한다. 냉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세계는 두 개의 축으로 분리돼 있었다. 두 개의 축은 노동자 착취구조를 심화시켰다.

그 뒤 등장한 것이 글로벌 금융세력에 의한 지배구조다. 금융세력은 경제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 영토를 침범하는 형태까지 보인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금융세력에 의한 원주민 학살도 나타난다. 금융세력이 경제·정치적으로도 힘을 뻗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주권을 이야기해야 한다.

금융세력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경제주권을 실현할 수는 없다. 최근 멕시코에서는 “정부에 반대하는 것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제주권을 실현하려면 정부에 반대하기보다는 정부를 바꿔 내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다.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폐단은 레지스탕스, 곧 저항하는 힘을 분열시킨다는 점이다. 운동세력이나 진보진영의 힘을 분열시키고, 경제주권과 연관된 밑바탕을 분열시킨다는 데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있다.

"무능한 정부에 반대하는 것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중요"

박승흡 : 신자유주의 확산이 라틴아메리카 노동자들의 생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삶의 질, 사회경제적 지표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후앙 칼데론 :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멕시코 얘기를 하면 될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멕시코 사례는 대표적인 무역실패 사례다. 원래는 농업생산국으로서 농업이 경제의 밑바탕이었는데, 지금은 무역실패로 빈곤층이 증가했다. 전체 인구의 50%가 빈곤층으로 분류되고, 그중 25%는 식량위기를 맞아 기아상태에 놓여 있다.

일자리 문제도 심각하다. 일자리를 상실한 빈곤층은 의료보험을 비롯한 사회서비스로부터 배제돼 있다. 청년층 실업문제도 심각한데,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하다.

농업도 미국에 예속됐다. 옥수수 등의 곡물은 수출에 유리한 작물로 대체됐고, 그 결과 곡물 생산량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지만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에 예속된 멕시코 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식량주권이라는 의미조차 상실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이를 ‘농업범죄’라 부른다. 외국 투기자본은 생산부문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멕시코에는 자국 은행이 없다는 점이다. 멕시코 민중의 권익을 보호하는 은행이 없다. 이런 과정에서 외국 투기자본이 멕시코로 유입되고, 동시에 멕시코의 민족자본은 외부로 유출된다.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무역이 확대되면서 경제가 발전하고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실상은 70년대와 비교할 때 나아진 것이 없다.

박승흡 : 그렇다면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세력들은 대안의 길을 찾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고 있나.

후앙 칼데론 : 라틴아메리카는 대륙이기 때문에 국가별로 공통점과 다양성이 존재한다. 차이를 존중하면서 조건과 상황에 맞는 답을 찾아가고 있다. 대답에 앞서 그 점을 먼저 말하고 싶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가 세력을 뻗치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근원적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는 각국의 발전모델, 즉 남미식 사회경제 발전모델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분열이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끼리의 단결을 반대하는 분열세력이 존재했다.

더구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오랜 기간 독재정권의 집권 아래 있었다. 70년대만 해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두 개의 국가를 빼고 전부 독재정권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이때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온두라스와 파라과이를 제외하면,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연대를 강화하는 다양한 협력체들이 늘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 기회를 빌려 반드시 강조하고 싶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변혁을 향한 강한 흐름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문제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바로 종파주의와 분열주의다. 노동자의 문제는 정당과 뗄 수 없고, 60년대 게릴라 투쟁이나 80년대 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이 이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고 있다. 이 같은 진보진영의 성장이 가능했던 이유는 통일전선의 형태를 지켜 왔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볼 때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단 하나의 해결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노동세력이나 좌파시민세력 같은 다양한 세력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속에서 힘을 모아 가는 것이다.

내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멕시코에서는 94년 사파티스타 봉기가 일어났다. 미국이 멕시코에 강제한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이었다.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이들은 국가의 전복을 외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국가의 내용이 바뀌기를 바랐다. 이들은 실제로 영토를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금융세력에 맞서는 사회투쟁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다.

멕시코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파티스타 운동을 통해 민중들이 보여 준 단결과 저력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정부를 세우고 천연자원에 대한 권리를 강조하면서,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단결로써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청년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소셜 커뮤니티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으며 사회현상에 눈을 뜨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진보진영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통일전선의 형태를 지켰기 때문"

박승흡 : 한국의 민중들도 군사독재정권을 극복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장시켜 왔다. 라틴아메리카와 역사적 공통지대가 존재한다. 또 노동자·민중진영이 통일전선의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는 지적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의 진보정치 운동은 분열에 처해 있다. 통일전선적 정신이 실현되지 못했고, 운동진영 내의 정파주의가 분열을 초래했다.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눈앞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진영은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대표를 후보로 내세울 수 없는 조건에 처했다. 안타까운 상황이다.

후앙 칼데론 :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통일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고 복잡한 과정이었다. 그 속에서 중요한 것은 진보를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모두 다 끌고 가야 하겠지만, 하다 보면 한두 명 못 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정체해서는 안 된다. 계속 단결하면서 전진한다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승흡 : 우리가 많이 쓰는 말 중에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소중하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진보진영도 어깨 겯고 전진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현재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한국식 표현으로 ‘먹튀 자본’이 문제가 된다. 금융세력은 자본시장은 물론이고 제조업까지 잠식해 이윤을 챙기고 있다. 그런 뒤 떠나가면 그만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토빈세 도입에 대한 전 세계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데.
 

토빈세 : 모든 국가가 자국으로부터 시작되는 외환거래에 대해 0.1~0.5% 정도의 세율로 부과하는 거래세. 투기목적의 국제자본 이동이 초래하는 금융위기를 방지하고, 금융시장의 전횡으로부터 각국 정부의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보호하기 위한 일환으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토빈이 제안



"멕시코 대선도 2차 투표 없어 … 보수적·반동적 후보에 맞서려면 야권연대 당연"

후앙 칼데론 : 토빈세 부과는 너무나 당연하다. 이익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돈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에 대한 과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박승흡 : 올해 12월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이번 대선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경제민주화의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경제민주화 그 자체는 확실히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경제민주화의 요체는 “같이 먹고살자”, “나에게도 복지를 달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경제민주화의 문을 여는 열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후앙 칼데론 : 경제민주화에 대한 한국사회의 고민에 공감한다. “국제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 있다. 국제적인 경험을 서로 나누되,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할 때는 각국의 상황과 조건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멕시코와 한국의 대선구조는 비슷하다. 유럽국가와 달리 2차 투표나 결선투표가 없다. 한 번의 투표로 대통령이 결정된다. 때문에 선거 과정에서의 선거연대도 유럽국가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2차 투표가 없기 때문에 진보진영은 사민당이나 중도우파 정당과 연대하고 있다. 유럽국가의 눈으로 보면 우경화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방식이 당연하다.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후보에 맞서기 위해서다. 이렇게 보면 모든 민족과 운동진영은 자신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멕시코만의 특별한 문제도 있다. 멕시코의 진보세력은 원주민에 대한 부채의식을 안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공영방송이라는 소통시스템이 자본에 독점돼 있다는 것이다. 대선은 민중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표출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대중들은 정보를 얻기도 어렵고 자신들의 생각을 표출할 방법도 없다. 방송의 민주화, 소통의 민주화는 멕시코 진보진영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박승흡 : 결선투표가 없는 한국의 상황에서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민주개혁세력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야권연대 방식으로 대선국면을 맞이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다. 앞서 지적한 대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고자 하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정치운동·대중운동이 대선 국면을 통해 연대하면서 분열의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후앙 칼데론 : 정말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상황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진보정치운동이다. 정치는 곧 예술이다. 예술적 정치를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협상을 잘해야 한다. 양보가 아니라 협상이다. 우리의 권리를 따내는 과정이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농민들이 가장 먼저 한 일도 협상이었다.

협상은 다양한 세력과 할 수 있다. 외부집단은 물론이고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협상은 가능하다. 한국의 운동세력이 이런 예술적 정치를 실천해 가기를 바란다.

박승흡 : 벌써 대담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세계 각지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진보매체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리고 진보매체에 종사하고 있는 언론인들에게 격려의 말씀 부탁한다.

후앙 칼데론 : 나는 기자로서 한 가지 확신하는 바가 있다. 기자야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전제조건이 있다. 기자는 이야기하는 방법, 표현하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 정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보가 없는 기자는 직업의 가치를 실현시키지 못한다. 내가 기자로서 가장 주의한 부분도 전문성과 표현이다. 넓고 풍부한 관점을 갖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생각한다.

기자는 목소리를 대신 전달해 주는 가교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힘이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해 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미디어사회를 움직이는 밑바탕은 여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매체의 역할은 막중하다. 진보매체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대중에 대한 교육과 의식화다. 선동을 통해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이 아니다. 대중을 똑똑하게 키워 내는 것에 일조해야 한다.


■ 후앙 칼데론(Juan Calderon)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전문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자문위원.
남미 분쟁지역 전문다큐멘터리 연출가.

- 에콰도르 과야킬 출생(1954년생)
- 벨라스코 이베라의 민간독재정부 당시 투옥·고문(1970)
- 군부독재에 의해 아옌데 통합정부가 집권하고 있던 칠레로 추방. 아옌데에 반대한 피노체트 쿠데타에 의해 강제로 프랑스 망명의 길 선택(1972)
- 살라자르 독재정부가 무너지던 ‘카네이션혁명’ 당시 포르투갈 체류(1974)
- 유네스코 라틴아메리카 자문(1977~1979)
- 레바논 분쟁 당시 저널리스트 활동(1978)
- 니카라과 소모자왕조 독재의 몰락과 산디니스타스의 승리(FSLN) 목격(1979)
- 파리 거주 엘살바도르 게릴라들의 정치외교 대표(1981~1988)
- 엘살바도르 FMLN-FDR의 분쟁 목격(1981~1989)
- 파리 라틴아메리카의집 웹마스터(1987~1989)
- 국제연락기구 꾸히에 앙떼흐나쇼날 공동설립자(1988)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자문위원(1989~1993, 현재)
- 멕시코 사파티스타운동(EZLN) 목격(1994~2001)
- 국경없는기자단 멕시코 연례보고서 팀장(1995~1996)
- 월드미디어네트워크 멕시코 통신원(1995~1997)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멕시코판 창설(1997)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멕시코 협력자(2000~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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