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정기훈 기자

한상균(51·사진)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은 지난 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청문회에서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의 진실이 일부 확인됐다"며 "국정조사를 통해 감춰진 진실을 모두 밝혀내고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국회가 국정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도 청문회가 끝난 다음날인 21일 국회에 쌍용차 국정조사 요청서를 보냈다. 한 전 지부장은 "대선 후보들에게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에 관한 입장과 대안을 묻는 공개질의서를 보낼 예정"이라며 "이 싸움은 쌍용차 노동자들의 억울함이 해소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공장을 떠나야만 했던 모든 이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갈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매일노동뉴스>는 한 전 지부장을 국회 쌍용차 청문회가 열리기 직전인 지난 18일과 청문회가 끝난 직후인 21일에 인터뷰했다. 18일 오전에는 서울 중구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에서 그를 직접 만났고, 21일에는 전화통화를 했다.

마른 얼굴, 온화해진 표정


그의 얼굴은 3년 전에 비해 매우 말랐다. 사진만 보면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짧게 자른 머리에 통통한 얼굴, 결의에 찬 눈빛으로 가득했던 3년 전 공장 안 얼굴은 더부룩한 머리와 수염, 살짝 패인 양 볼에 웃음 띤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상균 전 지부장은 2009년 쌍용차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77일간의 옥쇄파업을 이끈 인물이다. 회사측은 당시 전체 인원의 36%에 달하는 2천646명을 정리해고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명예퇴직 등을 통해 이를 실행하고 있었다.

한 전 지부장은 조합원과 함께 공장을 점거하고 장기간 싸운 끝에 정리해고자 중 일부를 무급휴직자로 전환하고 1년 후 복직시킨다는 내용의 8·6 노사합의를 이끌어 냈다. 합의서에 서명한 후 그는 곧바로 경찰에 연행됐다. 그에게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업무방해 등 9개의 죄목이 붙었다. 그를 포함해 구속된 쌍용차 노동자는 모두 96명에 달했다.

3년 후인 지난 8월 4일 자정. 그는 형기를 모두 채우고 만기 출소했지만 3년 전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 사이 22명의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8·6 합의는 사실 경찰력에 강요당한 항복합의서와 같았지만 그것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 회사가 약속했던 무급휴직자 복직은 한 명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 사이 스물두 명의 동지와 가족들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 쌍용차 정리해고의 숨겨진 진실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쌍용차 기획부도에, 부당한 정리해고. 책임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부당한 정리해고로 공장 밖으로 내쫓겨 희망을 잃었고 스스로 목숨까지 끊고 있는데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리해고를 단행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변명으로 회피하고 있다. 누가 이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겠는가."

청문회가 끝난 후 한 전 지부장의 목소리를 한층 흥분된 느낌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자신보다 청문회를 지켜봤던 조합원·해고자 또 그들의 가족들이 더 분노했다고 전했다. "스물두 명의 목숨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어떻게 사과 한마디 없었냐"고.

한 전 지부장은 "정리해고의 정당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최소한 사람이라면, 또 이 사태와 관련이 있는 자라면 스물두 명의 죽음 앞에 숙연하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그들은 사과 한마디 없이 책임 회피를 위한 변명으로만 일관했다. 그게 가장 가슴 아프고 분노스러웠다"고 말했다.

특히 2009년 8월 5일 새벽, 진압작전을 지시하고 총괄했던 조현오 전 경찰청장(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을 "정말 뻔뻔스러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국민을 지키는 경찰의 총수까지 했던 사람인데,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정말 의구심이 들었다. 경찰과의 충돌로 팔이 부러지고 이곳저곳을 찢긴 쌍용차 조합원들이 공장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병원에도 못 가게 하고선 '병원 치료 기준'이라며 8월 4일(진압작전 전날) 이전에는 '경찰은 수없이 다쳤지만 경찰에 의해 다친 노동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공개적으로 뻔뻔스럽게 할 수 있는지. 당시 공장 안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모욕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감옥생활 1년은 분노와의 싸움

- 3년 만에 감옥을 나왔다. 생활은 어땠나.


"처음 1년은 삭일 수 없는 분노가 방안 가득했던 생활이었다. 그때 참 삶이 모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 수가 있구나, 사람은 참 모질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나만 감옥에 들어왔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지부 간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지가 함께 감옥생활을 했다. 미처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구속될지 예상치 못했다. 같은 구치소에 있었지만 만날 수 없어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감옥 창살 사이로 비친 달과 별을 보며 힘내라고 마음을 전했던 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 세상을 향한 분노와 그런 감정들이 뒤엉켜 1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꼭 1년 뒤인 2010년 8월 9일, 항소심에서 나를 제외한 나머지 동지들이 집행유예로 모두 풀려났다. 내 감옥 생활 중 그날이 가장 기쁘고 편안한 날이었다."

- 감옥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견딜 수 있었나.


"감옥 생활 2년쯤 됐을 무렵 희망버스와 관련한 소식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 후 희망뚜벅이·희망지킴이·희망텐트 등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전해 들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자고, 더 이상의 죽음은 막아야겠지 않겠느냐고, 그런 절박함이 모여 시민의 힘·연대의 힘을 만들고 그것이 새로운 희망을 일궜다. 그러면서 나 역시 희망을 품었다.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감옥에서의 시간을 견디는 힘이 됐다."

- 3년간 스물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사했다. 감옥 안에서 비보를 접했을 텐데.

"그때의 이야기는 지금도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다. 노동자들이 일터에 있지 못하고 이렇게 노숙하며(싸우며) 살다가 희망이 없어 목숨을 던지는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들을 때마다 정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한때는 죽지 못해 산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비통하기까지 했다. 문상조차 가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힘든 순간이었다. 바깥에 있던 동지들도 마음은 저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역시 꺾이지 않고 싸움을 이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 희망버스가 던져준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반성을 많이 했다. 나 또한 공장 안에 갇혀 운동을 했던 정도의 경력밖에 없었지만 이제 그런 식의 운동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희망버스가 보여줬다. 단결과 연대 없이는 새로운 노동운동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성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늘 나눔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사회에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많다. 앞만 보게 하고 욕망만 쫓게 하는 사회 분위기에 묻혀 있다가 희망버스처럼 서로 연결되면서 우리 사회의 나비효과를 불러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힘없다고 체념했던 이들이 서로를 만나고 확인하면서 탄력을 받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도 이제 새로운 방식의 운동을 받아들이고 모색해야 한다."

- 지난 8월4일 자정께 경기 화성교도소를 출소했다. 많은 사람이 마중을 나갔는데.

"사실 깜짝 놀랐다. 예상을 못 했다. 몇몇 동지들만 조용히 가볍게 나를 반겨줄 것으로 생각했다. 막상 감옥 문을 나서니 수많은 사람이 나를 환영해줬다. 안에(감옥에) 3년 있다 나오면 금방 적응이 잘 안 된다. 이래저래 더 정신이 없었다. 특히 나는 환영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감옥에서 스물두 명의 동지와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다. 상주로서 문상 한번 가지 못했다. 질책을 받아야 할 내가 시끌벅적하게 환영을 받으니 당혹감도 있었다. 원래 내 계획은 조용히 출소해 대한문 앞 분향소를 찾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문상하고 동지들과 인사할 계획이었다. 그런 뜻을 사전에 전했는데도, 령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다."

한 전 지부장은 5일 새벽까지 환영식과 뒤풀이 참여를 강요(?)당했지만 그날 하루를 쉬고 이튿날인 6일 오전 곧바로 경기도 평택시 쌍용차 공장으로 향했다. 출근하는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나 출소했노라’ 인사를 했다. 2009년 당시에는 모두 한 전 지부장의 조합원이었고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었다.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출소를 축하해 주는 조합원들도 많았다. 오후에는 서울 중구 대한문 앞 분향소에서 문상을 하고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간부들과 해고자들을 만났다.

- 출소 후 40여일이 조금 지났다. 그동안 무엇을 했나.

"단절된 시간을 채워나가는 시간이었다. 3년의 공백을 메운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속된 말로 감도 떨어지고. 최근에는 쌍용차 청문회(18일 인터뷰 당시) 준비에 한창 바빴다. 여러 사람을 만났고 여러 의견을 나눴다. 청문회가 잘 돼야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의 진실을 더 알리고 문제 해결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년 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주제로 청문회가 또 열리는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많다. 국민은 '더 이상의 죽음은 막아야 한다'는 회초리를 들었고, 국회는 그에 반응해 청문회를 열었다. 죽음을 막자는 데 여야가 따로 있지는 않다."

그의 기대는 일부는 현실화 됐고 일부는 과제로 남았다. 20일 국회 청문회가 끝나고 21일 전화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소감이 그랬다. 그는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가 함께 해결될 수 있도록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싸워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감옥 3년,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아이들 … 미안하고 고맙다”


18일 오전 대한문 앞 분향소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당시, 마침 공지영 작가와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이사가 쌍용차 해고자들의 삶을 다룬 책 '의자놀이'의 판매 수익금을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기부하는 기자회견이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공 작가와 김 대표는 '의자놀이' 수익금 전액인 1억2천700만원과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한 2천600만원 등 1억5천300만원을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내놓았다. 그래서 물었다.

- 공지영 작가에게 고마움이 많을 것 같다.

"말 그대로 정말 고맙다는 이야기밖에는 할 말이 없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부분을 자신만이 가진 재능을 통해 또 다른 곳에서 풀어냈다. 쌍용차 문제에 뛰어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이렇게 도와준 것에 깊이 감사드리고 있다. 저 역시 '의자놀이'를 읽었다. 짧은 시간에 우리 문제를 간결하고 쉽게 정리했다. 사실 그대로를 호소력 있고 감동스럽게 전했다. 저마저도 숙연해질 정도였다. 공 작가였기에 가능했다.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나고 연락이 두절된 동지들도 많다. 그들도 이 책을 보면서 또 다른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많이 사서 읽어 달라. 책 살 때 인증샷 찍어 올리는 것 잊지 마시고.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시민운동이 되고 우리에게 힘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책 선전해도 되나?"

- 옥쇄파업하고 3년간 감옥 가고, 갔다 온 후 국회에 분향소에. 가족들에게 미움 받지 않나.

"제가 없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고 아이들도 많이 컸다. 고등학생이던 딸은 대학생이 됐고, 중학생이던 아들은 이제 고등학생이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시기인 사춘기를 옆에서 지켜주지 못했다. 졸업식과 입학식 모두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도 두 아이 모두 스스로 잘 이겨내고 잘 컸다.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출소 후에도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숙제로 남겨져 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고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동지들과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는 것이 급선무다. 청문회를 기점으로 진실을 밝히고 그것이 국정조사로 이어져 국가가 폭력으로 국민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해고된 동지들이 모두 일터로 돌아간다면 아이들에게 살짝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를 쓰고 싶다."

혹시 아이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을 내비친 적은 없냐는 얄궂은 질문에 그는 "요즘 애들은 참 빠르다. 아빠가 감옥까지 갔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고민이 없었겠냐"며 "3년간 애들이 많이 성숙했고, 아버지를 많이 이해하는 느낌이라서 고맙다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일터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 한 전 지부장의 바람은 무엇인가.

"노동자는 일터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다. 우리의 꿈 역시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터에 가서 일하고 조합원들과 다시 만나고 그들과 함께 소통하고 우리의 일터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나의 희망이자 지금 이 거리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모든 이들의 꿈이다. 지금은 비록 거리에서 싸우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또 우리의 승리가 단지 우리만 공장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기폭제가 돼야 한다. 그 심각성과 중요성을 알려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는 이제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자 가족의 일이 됐다. 우리가 겪은 일을 다른 사람과 가족들이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동안 보내준 연대와 도움만으로도 정말 큰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아직은 더 싸워야 한다. 아직은 더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셔야 한다. 우리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승리로서 꼭 보답하겠다."

희망버스에서 찾은 희망 철학

지난 18일 그렇게 한상균 전 지부장과 1시간 남짓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 감사를 표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한 전 지부장은 "아참 할 말이 아직 남았다"며 기자를 다시 끌어 앉혔다. 그러면서 그는 대뜸 "매일노동뉴스 창립 20주년을 축하한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감옥에 있을 때도 매일 매일노동뉴스를 봤다. 매일노동뉴스 역시 감옥 생활을 견디는 데 큰 힘이 됐다. 출소한 후에도 곧바로 집으로 매일노동뉴스를 신청해서 보고 있다. 그 매일노동뉴스가 스무 살 청년이 됐는데, 내가 축하 인사를 안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그가 말했다. 인터뷰에 써도 되느냐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그러라고 말하고 있지 않냐"는 진심 어린 답변이 돌아왔다.

한 전 지부장은 "이제 그 누군가 아무리 짓밟고 탄압해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매체가 됐으니 앞으로도 노동현장의 소식을 가장 빠르게 전하면서도 노동운동의 중심을 잡아 주는 뼈대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매일노동뉴스가 해야 할 역할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들이 노트북에 한 두 글자씩 박히면서 노트북 무게만 잔뜩 무거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노트북 무게에 어깨가 짓눌리지 않도록 힘을 잔뜩 주어야만 했다. 그는 "청년 매일노동뉴스가 국민에게 노동의 이야기를 전하는 매체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며 "더욱 성장하고 발전하길 기원하겠다"고 말했다.

한 전 지부장이 매일노동뉴스에 전한 연대의 마음은, 그가 "정말 고맙다"고 표현한 쌍용차 해고자에게 날아들었던 연대의 마음과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 같은 마음이 모여졌기에 희망버스도, 희망뚜벅이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희망이라는 단어가 한때는 희망스럽지 않을 때가 있었죠.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렸고 절망만 가득했던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는 희망이 되지 못했습니다. 희망을 찾지 못했던 노동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고요. 희망버스는 희망이라는 단어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줬습니다. ‘더 이상의 죽음만은 막자. 생명만은 살리자’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줬던 연대. 그게 희망이었지요."

한상균 전 지부장이 ‘희망버스’에서 찾은 나름의 ‘희망 철학’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