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이주노동자가 받은 임금명세서다. 한 달에 2일 쉬고, 하루 11시간씩 근무해도 100만원이 넘지 않는다. 사업주는 갖가지 명목으로 임금을 깎기 일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업장을 바꿀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묵묵히 일을 해야 한다. 지구인의정류장

캄보디아 출신의 20대 이주노동자 A씨는 최근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한 시민단체를 찾았다. 현재 일하는 사업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합법적인 취업비자를 가지고 지난해 초 입국한 A씨는 정부가 정해 준 농촌현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일은 힘들었다. 매일 아침 6시30분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하고, 한 달에 이틀만 쉬었다. 월 330시간이 넘는 고강도 노동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월급은 100만원 남짓에 불과했다.

노동환경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터를 왜 바꾸고 싶냐는 활동가의 질문에 A씨는 "밤에 무서워서 바꾸고 싶어요"라며 어눌한 한국말로 답했다. 그는 거주지에서 동떨어진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웠다. 사람들이 해코지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더 힘들게 했다.

이주노동자는 '일터 찾을 권리' 없다

비닐하우스 기숙사에서 지내며 최저임금 근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 A씨가 일터를 바꾸고 싶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① 사장에게 안정적인 노동환경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한다.
② 현재 일하는 곳을 떠나 다른 일터를 찾아 그냥 떠난다.
③ 돈을 주든지, 아부를 하든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사장의 마음을 돌려 일터 변경에 대한 승낙을 받아 낸다.
④ 현재 일하는 곳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증명할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고용노동지청에 진정하거나 고발한다. 그 결과를 자기를 관할했던 고용센터에 통보한 뒤 사업장 변경조치를 기다린다.

일단 ②번은 정답이 아니다. 사장의 승낙 없이 고용센터가 정해 준 일터를 벗어나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다. 불법체류자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올해 7월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외국인은 146만명이다. 이 중 불법체류자는 17만명 수준이다. 시민·사회단체는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원까지 포함하면 20만명을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적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이 오답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주노동자들에게 불법체류자의 삶을 강요하는 불편한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문제의 핵심은 고용허가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김이찬 감독은 고용허가제를 지목했다. 다큐 제작을 위해 김 감독이 만든 '지구인의정류장'이라는 제작단은 최근 이주노동자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다.

사실 외국인근로자 고용 등에 관한 법률(고용허가제법)은 이주노동자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입법 운동이 일어나 만들어졌다. 지난 91년과 93년 해외투자법인연수생제도와 산업기술연수제가 각각 도입된 이래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은 '노동자성'을 부인하는 방향에서 이뤄졌다. 결국 두 제도는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해 불법체류 문제의 온상으로 대두됐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정치권은 인권단체들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여 2003년 고용허가제법을 만들었고, 2004년부터 시행했다.

고용허가제법 시행 이후 이주노동자의 체류는 급증했다. 시행 다음해인 2005년 10만4천명이던 것이 3년 후인 2008년에는 45만7천명으로 늘어났다. 지난해에는 48만9천명이었고, 올 7월 현재에만 46만7천명에 이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용허가제는 도입취지를 살리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전면합법화 내용이 빠져 있는 데다, 사업장 이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입취지 못 살리고, 불법체류자 양산


고용허가제 도입 이후 정부는 제도 안착화를 위해 허가받은 이주노동자와 허가받지 않은 이주노동자를 분리하는 정책에 힘을 실었다. 즉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불법체류자라 부르며 대대적인 단속을 실시하면서 추방정책을 강화한 것이다. 정부는 매년 국내 노동시장 교란방지와 합법적 체류질서 확립이라는 명분하에 미등록 체류자에 대한 집중단속을 벌이고 있다. 집중단속기간에 각 지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단속 할당 목표치를 부여하는 '단속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다. 해마다 단속 과정에서 사고가 되풀이되는 배경이다. 지난해 김포지역 단속 과정에서 중국동포 허아무개씨가 불심검문을 피해 도주하다 체포된 후 호송 중 심장마비로 숨졌다. 2010년에는 야간단속 과정에서 4층 기숙사에서 베트남 노동자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올해 5~6월 단속기간에는 관광나이트에서 근무하던 베트남 이주노동자가 경찰의 점검을 단속으로 착각해 2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가 다리 골절상을 입은 뒤 치료를 위해 인권단체를 찾기도 했다.

정부는 단속추방정책을 불법체류자를 줄이기 위한 불가피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고용허가제에 담긴 차별요소를 걷어 내지 않는 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양산과 단속에 따른 사고 발생의 악순환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기돈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고용허가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사업장 이동의 원칙적 금지' 조항을 꼽았다. 그는 "고용허가제는 폭력과 부당한 임금에 시달리고 있어도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도록 사업장 변경 자체를 제한하고 있다"며 "미등록 체류자로의 전락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불법파견도 횡행 … 항변했더니 길가에 내다 버려

S씨와 P씨는 지난해 2월 한국에 왔다. 농협연수원에서 교육을 마친 뒤 사장인 K씨를 따라 첫 일터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의 일터는 제3자인 J씨의 미나리밭이었다. K씨는 서류상 사장이었고, 사실상 불법파견으로 일을 시작한 것이다. 한 달에 이틀 쉬고 매일 11시간씩 일했다. 월급은 100만원이었다. 현장에서 여권까지 맡겨 둔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일을 하던 이들은 사장에게 "송금을 해야 하니 여권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욕설이 돌아왔다.

항변을 했다는 이유로 한 달치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일을 계속하던 이들은 같은해 11월 재차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번에는 욕설로 그치지 않았다. 고용센터로 데려가 주겠다더니 한적한 곳에 이들을 버렸다. 물어물어 고용센터를 찾아갔더니 "사장 K씨의 사인이 없으니 돌아가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결국 이들이 경찰의 중재로 만난 사람은 그들을 고용한 K씨가 아니라 미나리밭 주인 J씨였다. K씨가 이들을 고용해야 한다거나, 불법파견이라는 사실은 경찰의 관심 밖이었다. 한국말이 서투른 이주노동자들은 다시 미나리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용허가제법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고용주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터에서 차별대우와 계약위반, 폭언과 폭행이 난무해도 사업주의 동의 없이는 이주노동자 자신의 의사로 일터를 바꿀 수 없게 돼 있다. 게다가 법에 명시된 사업장 변경사유에 해당하더라도 3년의 취업기간 중 3회만 이직이 가능하다.

이주노동자가 원치 않아도 사업주에 의해 미등록 체류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사업자는 직장이탈 신고를 할 수 있는데, 신고 이후 이주노동자가 일정 기간 반박을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미등록 상태가 된다. 반론기간이 지나면 따질 수도 없다. 사업자가 이주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 쥐어짜는' 정부 정책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음에도 관련제도는 이주노동자를 옥죄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6월 사업장 변경을 원하는 이주노동자에게 구인업체 명단 제공을 중단하는 '외국인근로자 사업장변경 개선 및 브로커 개입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당시 노동부는 "잦은 사업장 변경은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영세업체의 인력난을 심화시킨다"고 설명했다. 이에 이주노조는 성명을 내고 "사업장 변경기간인 3개월 안에 이주노동자는 사업주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고용해 줄 것을 기다리는 행위 외에는 어떠한 구직노력도 할 수 없게 된다"며 "더욱 심각한 것은 사업주의 구직제안을 거절할 경우 2주일 동안 알선이 중단된다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이주노동자는 사업주의 전화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사업장의 근무조건을 제대로 비교하지 못한 채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직장선택의 자유와 계약의 자유, 노동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과 ILO 협약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동부는 "외국인근로자가 수십 개 사업장 중 골라 갈 수 있게 되면서 근로계약 해지 등 무리한 사업장 변경시도가 빈번하다"며 "기업의 인력난을 감안하면 자율합의 해지에는 근로계약 해지를 의도적으로 유도한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일할 자유 '노동허가제' 도입해야

고용허가제 시행으로 갖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노동·시민·사회진영은 그 대안으로 노동허가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노동허가 기간을 기존 3년에서 더 늘리고 이주노동자가 원할 경우 다시 일정기간 특별노동허가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사업주 승인 없이 사업장 이동을 자유롭게 변경하자는 요구는 당연히 포함됐다.

고용허가제를 두고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정부는 이달 13일 외국인력정책위원회를 열고 내년도 외국인력 도입규모를 올해보다 5천명 늘린 6만2천명으로 결정했다. 예년에 비해 3개월이나 앞당겨 확정했다.

김이찬 감독은 "신규인력 확충에 앞서 이주노동자의 노동실태, 즉 노동관계법이 현장에서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정교한 조사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며 "늘어난 이주노동자들이 또다시 열악한 노동환경에 무방비로 방치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기돈 사무국장은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주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기 때문에 갖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사업장 변경 권리를 포함하는 노동허가제를 도입해 이주노동자에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주노동자 농업 백서' 나온다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국내에 취업할 수 있는 외국인력의 규모를 매년 정하고 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5천명 늘어난 6만2천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취업비자를 받게 될 전망이다. 도입규모를 정하는 것과 함께 정부는 이주노동자가 일할 업종도 관리한다.

내년에는 제조업에 5만2천명이 배정됐다. 이어 농축산업 6천명, 어업 2천300명, 건설업 1천600명, 서비스업 100명이다. 국내에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들은 정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할 분야가 결정된다. 업종 중 제조업과 농축산업에 배정되는 인력규모는 해마다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다. 국내 인력이 부족한 탓이다.

최근 경기도 안산과 의정부 등에 위치한 이주노동자 인권단체에는 농축산업에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하소연이 부쩍 늘고 있다. 동절기에는 임금을 주지 않고 쫓아내거나, 불법파견 업체를 통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사례가 접수되고 있다. 농축산업의 경우 열악하다고 소문난 제조업보다 노동환경이 더 열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실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이주노조공동행동은 '(가칭)외국인노동자 농업분야 백서' 발간을 준비 중이다. 40여개의 사례가 백서에 담긴다. 백서 발간을 총괄하고 있는 김이찬 감독(지구인의정류장)은 "농축산 현장에서 발생한 폭행과 임금체불, 불법파견 문제 등 유형별 사례를 수집해 책으로 만들고 있다"며 "12월 중에 완성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백서는 노동허가제 도입을 위한 여론화 작업의 일환으로 인권단체와 정부·정치권 등에 배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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