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은회 기자

“185개 회원국 노사정으로 구성된 국제노동기구(ILO)는 한국이라는 회원국의 정부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있어 답답함을 느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짜증이 난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팀 드 메이어(Tim De Mayer) ILO 국제노동기준 및 노동법 선임전문위원의 말이다. 국제노동 전문가인 그는 지난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01차 ILO 총회에 앞서 한국정부가 밝힌 입장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정부는 최근 ILO 결사의자유위원회로부터 아주 이례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결사의자유위원회는 98년 ILO 고위급 대표단이 방한했을 때 한국정부가 “가까운 장래에 ILO 87호 협약(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과 98호 협약(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을 비준하겠다”고 공언했던 사실을 계속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왜 약속을 해 놓고 여태 안 지키느냐는 지적이다.

결사의자유위원회가 회원국 정부를 상대로 ILO 협약비준을 촉구하는 강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관행을 감안하면 한국정부에 대한 압박은 확실히 전례가 없는 것이다. 이에 한국정부는 ILO 총회에 앞서 올해 4월 결사의자유위원회에 답변을 내놨다. 정부는 답변서에서 “국내법 중 일부 조항이 ILO 협약 87호·98호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두 협약 비준이 매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에 관한 계속된 논쟁으로 인해 87호·98호 협약의 비준 가능성이 제한적이다”고 통보했다. 복수노조·타임오프 문제 때문에 ILO 핵심협약을 비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팀 드 메이어 선임전문위원은 “한국정부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대고 있다”고 일축했다. 그는 “한국정부는 한국의 법률이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며 “하지만 ILO 핵심협약은 ‘비준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서 비준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존중해야 하는, 그 안에 녹아 있는 정신을 존중한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강조했다.



ILO 협약 비준약속 어긴 한국정부, 압박 나선 ILO



ILO와 양대 노총이 공동주최한 ‘국제기준에 비춰 본 한국의 노동기본권과 ILO협약 비준 확대방안’ 토론회가 17일 오전부터 서울 여의도 렉싱턴호텔 그랜드스테이션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ILO 핵심협약 비준을 미루고 있는 한국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날 주요하게 다뤄진 ILO협약 87호와 96호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활동을 할 권리, 단체교섭을 벌이고 파업에 나설 권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ILO 결사의자유위원회는 “한국정부가 국내 노동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87호·96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팀 드 메이어 선임전문위원은 “가령 17년째 계류돼 있는 1865호 사건(복수노조 관련)에 대해 ILO 결사의자유위원회는 20페이지가 넘는 권고문을 냈는데, 이것이 과연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 회의가 들 지경”이라며 “진정과 권고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국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꼬집었다.

복수노조·타임오프 문제에 대한 ILO 결사의자유위원회 권고의 핵심은 이렇다.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여부를 노사자율에 맡기고, 소수노조의 교섭권을 제약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와 관련해 ‘대표노조가 없을 경우 모든 노조에게 단체교섭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계가 요구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의 방향과 상통한다.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지난해 12월9일로 한국이 ILO에 가입한 지 20년을 맞았지만, 한국정부는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기는커녕 93년부터 지금까지 13개 분야에 걸쳐 ILO 협약을 위반하는 문제로 수십 차례 시정권고를 받았다”며 “핵심협약 비준 확대와 노조법 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주장했다.

김장호 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은 “한국은 헌법으로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제정된 노조법이 노조활동을 위축시키고 제한하는 실정”이라며 "특히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와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조항은 민주노조를 파괴하는 정부와 사용자의 무기로 악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날 토론회에 정부를 대표해 참석한 권혁태 고용노동부 노사협력정책관은 “협약 비준 숫자로 우리 현실을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고, 협약 비준 여부와 별개로 한국의 노동관련 법·제도는 ILO의 협약정신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현실적으로 논쟁의 소지가 있는 협약의 비준은 굉장히 어렵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복수노조·타임오프 문제에 대해서도 노동계나 ILO와는 견해를 달리했다. 권 정책관은 “13년이라는 유예기간을 거쳐 노사정 논의 끝에 시행된 복수노조·타임오프의 배경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며 “노동계가 문제 삼는 교섭창구 단일화 조항에 대해서는 이미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내린 상황에서, 노동계가 내심 전임자임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소수노조의 교섭권 문제를 수단으로 삼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노동기본권 향상, 노조법 개정 정도로는 어렵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한국의 노동기본권이 국제기준에 부합하려면 노조법 개정을 넘어서는 정부와 사법부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노동관계법령 몇 개 뜯어고치는 수준으로는 노동기본권의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조경배 순천향대 교수(법학과)는 “국제적으로 볼 때 단결권을 비롯한 노동기본권의 온전한 보장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민주적인 복지사회로 가는 필수요소”라며 “그런데 한국의 노동자는 노동기본권을 제대로 누리기는커녕 헌법을 곡해하는 모순투성이 법·질서에 속박돼 있다”고 주장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은데도 정작 경제민주화의 요체를 이루는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부차적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지적이다.

조 교수는 “과거 국가안보나 경제성장을 앞세워 노동기본권을 극단적으로 억압하던 노동정책과 입법경향이 이제는 경쟁력·유연성·효율성 등 신자유주의 논리로 재포장되면서 반자유적·반민주적 성격이 도리어 강화되고 있다”며 “특히 파업 노동자에게 과도한 형벌을 적용하는 한국의 노동법은 치안경찰법에 가깝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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