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한국노동사회
연구소 이사장

지난 3일은 이소선 어머니가 별세하신 지 한 해가 되는 날이었다. 느닷없이 퍼붓는 집중호우의 먹구름이 모처럼 걷힌 화창한 날씨에 낯익은 많은 사람들이 모란공원에 모였다. 울분에 찬 노동자들의 단결투쟁가를 전주곡으로 행사가 시작됐다. 살아 있는 자들의 이런저런 다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한 해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진 노동현실에 대한 회한과 죄스러움이 섞여 분위기를 무겁게 눌렀다. 누군가 나타나자 여기에 낯짝을 내미느냐는 거친 질책과 항변도 터져 나왔다. 초가을 무더위로 끈적이는 공기는 며칠 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저지른 ‘돌발사건’의 후유증 때문인지 쉬 가시지 않아 보였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위한 그의 ‘광폭 행보’는 1주기 추모의 정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의 꿈을 여지없이 뭉개 버렸다.

지난달 28일 결과가 예상됨에도 굳이 전태일 열사를 찾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도토리 키재기 예비 후보군을 줄세우고 일찌감치 결선후보로 등극한 박근혜 의원은 곧바로 방문외교를 시작했다. 느닷없이 봉하마을과 동교동·상도동을 방문하더니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데 이어 곧바로 전태일재단을 찾았다. 그리고 조계종과 여성단체·대학교를 들렀다. 모토는 ‘국민대통합’이라 했다. 새누리당은 열광의 도가니였고 발빠른 광폭의 파격이라는 보수언론의 칭송은 침이 마를 정도였다. 민주통합당은 정치 쇼라고 비아냥댔지만 완전히 의표를 찔린 아연실색의 모습이었다. 신명이 난 그는 거침없는 행보를 거듭했다. 성공 여부는 문제 삼지 않았다. 만남의 시도 그 자체가 목표이자 성과로 치부하는 듯했다.

그가 강조하는 국민대통합의 논거는 이렇다. 과거 일을 들먹여서 뭘하느냐, 역사의 판단에 맡겨 두고 지금부터 잘해서 국민을 행복하게 해 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민의보다는 주관적 추진력을,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박정희의 통치행태 그대로다. 게다가 그의 주장은 이명박 정권과의 단절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총선 때 한나라당이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이명박 정권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번에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역사관이 비판의 표적이 되자 역사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곧 박정희 정권 시대에 자행됐던 폭력적 탄압과 그로 인해 생긴 피해와 고통을 사과하고 그것으로 과거사를 정리하자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나아가려는 국가대계의 발목을 잡는 과거종속형 소인배로 비치기 십상이다. 전태일재단 방문 해프닝을 100만불 쇼라고 희색이 만면해했다는 박근혜 캠프의 논평은 그런 의도의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박근혜 후보가 ‘국민대통합’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역설의 아이러니를 보는 듯하다. 문제의 원인 제공자는 박정희 정권이기 때문이다. 박 정권의 뿌리는 친미·친일·반공세력이다. 정권은 조국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국내외 거대 독점자본을 앞장세워 노동자와 농민을 희생양 삼아 경제개발을 추진했다. 그나마도 정치 경제위기에 봉착하자 영호남 대결론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마지막에는 겨우 걸쳐져 있던 민주주의 기본질서마저 송두리째 파괴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속죄양으로 삼아 종신 대통령의 권좌에 앉았다. 그 후과는 지금의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지역패권주의의 퇴행적 정치구조로 남아 나라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결국 아버지는 정치·경제·사회의 편 가르기로 정권을 유지하고, 그 딸은 국민대통합으로 정권을 잡겠다고 나선 모양새가 박근혜식 파격의 광폭 행보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옆으로 기어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과연 그럴까. 박근혜 후보는 5·16 군사쿠데타를 아버지의 불가피한 선택이라 했고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고 거듭 역설했다. 다만 “유신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헌신하셨던 분들, 희생하고 고통을 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한다. 장래에 대한 구상과 설계는 지난날에 대한 냉혹한 평가와 인식에서 출발하지 않는 한 허구임을 역사는 증언한다. 민주주의 헌정을 총칼로 중단시키고 노동자·농민의 피땀 어린 희생을 구국의 영도자가 이룬 경제성장 신화로 채색한 나머지 종신독재의 길로 들어선 역사의 원천과 과정은 거부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그 결과로 나타난 희생과 고통은 사죄하겠다고 한다. 논리적 모순의 극치이자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대권을 잡기 위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은 어디든 달려갈 것이다. 현존하는 심각한 노동 문제는 외면하면서 정치적·사회적 신망이 높은 전태일재단을 찾아가는 식의 행태를 계속할 것이다. 그의 주장도 흔들림 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10월 유신은 큰 돈 드는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권력집중이었다”는 핵심참모 홍사덕의 궤변은 바로 그의 주장에 다름없다. 박근혜 후보의 현대사 인식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한 그가 내세우는 복지·일자리·경제민주화가 노동자 문제를 비켜 가는 고담준론으로 끝날 여지는 매우 많다. 대선 바람이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에서 역사의 준엄한 가르침을 한 칼에 정리해 내는 그의 발걸음에 일어나기 쉬운 착시현상을 경계하는 이유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leewb45@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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