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이승만 시절 폭력의 상징 중 하나는 정치깡패였다. 자유당이 고용한 이정재는 국회에 난입해 자유당 집단 탈당을 기획했던 김두한 의원을 집단폭행했고, 이정재의 행동대장 유지광은 장충단공원 야당집회에 깡패 수십명을 투입해 집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4·19 민중항쟁의 발단이 된 4월18일 고려대 3·15 부정선거 규탄집회 습격사건 역시 이들의 작품이었다.

최근 안산 SJM이나 현대자동차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사건은 이승만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깡패들의 고용주가 50년대에는 자유당이었다면 2000년대에는 기업이 됐다는 사실만 바뀌었다. 정치깡패들이 국회와 야당집회에 난입할 때 경찰이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듯이, SJM 안산공장에 무장한 용역깡패들이 난입했을 때 경찰은 공장 밖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기하고 있었다. 현대차에서는 용역과 노무관리자들이 비정규직지회 간부들을 납치해 두들겨 팬 후 바닷가에 버렸다. 심지어 아예 현대차 용역들은 경찰과 미리 합의라도 됐다는 듯이 비정규직지회 간부들을 납치해 경찰서로 데리고 가기도 했다. SJM에서 경찰은 경비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용역깡패 투입시 조합원들을 연행한다는 적반하장 식 작전을 수립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 정치깡패들이 폭력사태를 만들고, 경찰이 뒤에서 피해자들을 연행했던 것과 똑같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본질적으로 노동자에게 폭력적이다. 사업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회사가 세운 규율에 맞춰 작업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율적이라기보다는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한다. 사업주는 이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동자들의 노동을 조금이라도 더 짜내야 하고, 작업장에서 자유시간을 통제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임금으로 구매하는 것은 노동자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노동력)이지 실제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노동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 사이의 경쟁은 같은 임금을 주고 누가 더 노동자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치까지 실제 노동을 시킬 수 있는가를 두고 이뤄진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70~80년대에는 군대식 규율로, 90년대 이후부터는 노동자들의 작업과 휴게시간을 미시적으로 통제하는 각종 전자장비로, 2000년대 이후로는 고용·임금 유연화를 통해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를 이뤄 왔다.

하지만 폭력에는 제한이 따른다. 자본이 사업장 안에서 이윤을 위해 무한의 폭력을 행사한다면 노동력의 재생산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만개한 19세기 초 영국에서 아동노동을 금지시키고 산업재해 관련 규제들을 도입한 핵심 이유는 바로 더 큰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는 아동을 작업장에서 죽이고, 한참 더 일할 수 있는 노동자를 산업재해로 잃어서는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업장 안에서 사업주가 깡패를 동원해 노동자를 마음대로 때려 다치게 한다든지 하는 폭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노동력의 관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는 자본의 폭력을 제어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를 구성하는 폭력에 대한 국가의 독점(이른바 공권력)은 자본이 개별적 이해가 아니라 최소한 자본가 계급 전체의 이해를 위해 개별적으로 폭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도록 규제한다.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군사정권이라 해도 어쨌건 외양은 최소한 정부가 자본을 대신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유는 큰 틀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성장해 나가고 있음에도 최소한의 공권력조차 포기하고, 아예 깡패를 통해 이해를 취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즉 개별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자본 전체의 이해를 조율하는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은 더욱 필수적이게 된다. 그리고 국가에 의한 폭력, 공권력은 그 규모가 커질수록 좀 더 보편타당해야 저항에 덜 부딪힌다. 법적 절차의 강화는 공권력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근 급증하는 용역깡패에 의한 폭력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도 문제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구미 KEC·아산 유성기업·안산 SJM·울산 현대차 등에서 보이는 용역깡패들의 행동은 공권력에 대한 대체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SJM에서 확인된 용역깡패들의 장비는 아예 경찰을 넘어선다. 울산에서는 대낮에 공장 안에서 납치 폭행까지 버젓이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재생산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권력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재계 5위의 김승연 한화 회장이 조폭을 동원해 야구방망이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반 시민을 폭행한 일 역시 공권력 붕괴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정권의 성격이 민주적이든 반민주적이든, 공권력이 무너지고 개별 자본의 폭력 행사가 커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가 그 토대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십수 년에 걸쳐 진행 중인 개별 자본의 커져 가는 폭력 행위들은 겉으로는 자본의 힘이 더욱 커져 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국 자본주의 전체로 보면 오히려 체제 자체가 퇴보하고,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넘어선 더 나은 세상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의 정치깡패를 박정희가 사형장으로 보냈다고 노동자들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이명박을 대신하겠다고 나선 이가 박정희의 딸 박근혜다.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되풀이된다는 말이 바로 이런 상황일 게다. 진보운동의 성장만이 이 반복되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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