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화 변호사
(민주노총법률원)

모든 길 위에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광장 동쪽에는 노동자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이제는 세기도 힘든 시간 동안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학습지 교사들이 있습니다.

광장을 가로질러 횡단보도를 건너 대한문 앞에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뒤를 이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들이 2012년 4월부터 “해고는 살인이다” 라는 구호를 힘겹게 외치면서 먼저 간 동료들의 혼을 달래고 있습니다. 시민들과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을 관람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삼복더위에도 두터운 전통복장을 입고 소멸한 왕조의 교대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자들의 고단하면서도 지루한 직업의 현장, 이를 관람하며 여유롭게 사진 촬영하는 관광객들, 바쁜 업무에 쫓겨 무심히 지나쳐가는 도시민들….

덕수궁 돌담 한켠에 이런 풍경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농성 천막이 슬픔과 분노, 그리고 끈질긴 희망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풍경을 잠시라도 눈여겨 보노라면 아무리 두 눈을 비비더라도 현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부조화스럽고 씁쓸한 꿈속같은 감상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이를 뒤로 하고 정동길로 접어들면 서울시청 별관 앞 각종 민원성 피켓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시장님’이 바뀌어도 ‘사는 사람들’의 불만들은 언제든 새로 생겨납니다.

그러나 정동길을 소요하는 이들에게는 답답한 현실을 곧 잊을 수도 있게 만드는 한국 개화기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정동길’이 펼쳐집니다.

신아일보·이화여고·프란체스코회 건물들. 잘 정비된 가로수가 근대화 초기 서울의 세련된 풍모를 뽐내고 있습니다. 너무도 빨리 변해버린 도시, 서울에서 이만큼 고즈넉하고 단정한 곳이 또 있을까 합니다만 역설적이게도 이 길의 끝자락에 10년째 노동자 측 대리사건만 하며 ‘쉽지 않은 길’을 간다고 모인 ‘민주노총 법률원’ 사무실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여기로 적을 둔지 이제 겨우 6개월째입니다. 매일같이 이 길을 걸으며 출근하고 일을 합니다.

이 길의 처음과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나아가 이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세상 구석구석에서 투쟁하고 노동자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희망의 기운들과 호흡하려 합니다. 그들의 앞과 뒤, 옆 그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다짐은 바로 이 출근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매일 아침 ‘정동길’로 출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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