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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민주주의의 허상과 노동자 민주주의

인도 사람들을 만나면 누구나 자기나라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the largest democracy in the world)라고 자랑한다. 인도와 인구 규모가 비슷한 중국을 예로 들며, 일당 지배가 아닌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정부를 선출하는 자기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이야기한다. 인도의 노동조합 간부들도 애국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기나라를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들이 민주주의라고 내세우는 척도는 정기적으로 선거를 한다는 것이고, 사상과 표현 그리고 결사의 자유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인도를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표현은 서방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데, 내 생각에는 북한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스탈린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실재를 반영하지 못한 관성적인 표현이라는 뜻이다.

공장과 사무실에 민주주의가 작동하는가

인도 노조간부를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 “정기적으로 선거만 하면 민주주의인가”라고 되물어 봤다. 선거를 하면 노동자들의 삶에 나아지는 것이 있는가. 임금이 오르고 노동조건이 개선됐는가. 특히 인도가 LPG(자유화 liberalization, 민영화 privatization, 세계화 globalization)를 적극 추진한 1990년대 이후 서민들의 삶에 변화가 있었는가.

대답은 ‘아니오’였다. 지난 20년간 빈익빈 부익부는 심화됐고, 공장과 사무실에서 노동권은 후퇴했으며, 경제성장의 과실을 노동자·서민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인도 정부는 친(親)기업 노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노동법의 집행과 감시에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교육 참가자들을 조별로 나눠 “노동자 입장에서 볼 때, 인도는 과연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에 부쳤다.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토론 결과가 주를 이뤘다. 일터에서 노동법이 집행되지 않으며, 법집행을 위한 정부의 감시·감독 기능은 마비됐고, 법정에 가더라도 사용자 편향의 판결이 주를 이룬다. 노동자 입장에서 법 앞의 평등과 법치주의는 무너져 내렸다.

구조조정·아웃소싱·정리해고 같은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그 가족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이 교섭대상이 되기는커녕 사용자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재무제표를 비롯한 기업정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접근은 차단돼 있다. 정규직 일자리는 값싼 노동(cheap labor)인 비정규직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고 사회보장은 그림의 떡이다.

식민지의 귀환

민주주의는커녕 식민지가 돌아왔다는 평가도 나왔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노동자에 대한 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착취, 그리고 사회적 억압과 문화적 소외에서 47년 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12개가 넘게 갈라져 있는 노총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성토가 터져 나왔다. 이름만 근사한 ‘결사의 자유’가 사실은 ‘분열의 자유’를 가져오면서 노동운동의 관료화·귀족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논쟁은 공장 안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로 이어졌고, 유능하고 강한 노동조합만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교육을 마치면서 “그럼 한국은”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물꼬를 텄던 일터의 민주주의는 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위축됐고, 지금껏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답보 상태에 빠져 있다. 노동자와 서민의 입장에서 법 앞의 평등과 법치주의는 무너진 지 오래다. 빚을 내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 갈 수 없는 노동자들이 부지기수다. 부동산과 주식을 통한 거품경제와 대기업 위주의 수출 드라이브의 이익은 가진 자들의 주머니로 집중됐다. 오늘의 생활은 힘들고, 미래의 삶은 불안하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이 떠드는 ‘경제민주화’에는 공장과 사무실에서 노동조합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가 빠져 있다. 하기야 유능하고 강한 노동조합은 법·제도의 보호가 아니라 노동조합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인도에서 노조간부 교육을 끝내며 되새긴 의문이다.

ICEM 컨설턴트 (icem.asia.mnc@gmail.com)

윤효원  icem.asia.mn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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