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민주주의가 춤추고 있다. 유로존 붕괴위기까지 치닫던 그리스사태는 총선으로 그리스 인민의 투표로 선출된 권력에 의해 흘러가게 됐다. 지금 세상은 민주주의로 권력이 선출되고 그 권력에 의해서 인민의 일, 국가의 일이 결정된다. 아무리 독재적인 권력일지라도 인민으로부터 그 권력의 정당성 근거를 찾는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이 세상에서 권력의 기술이 된지 오래다. 2012년 말 대선을 앞둔 지금, 이 나라에서 어느 때보다도 권력의 선출문제로 뜨겁다. 정당과 민주주의, 국회의원 선출과 민주주의, 대통령후보 경선과 민주주의….

권력이 싹트는 장에서는 민주주의로 떠들썩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말하고 있다. 지난 4·11 총선을 둘러싸고서 민주주의로 얼마나 시끄러웠던가. 보수의 당이건, 민주의 당이건, 진보의 당이건 당의 후보가 되고자 당의 민주주의를 외쳤다. 국회의원이 되고자 나라의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리고 이 나라 노동운동이 관계한 통합진보당에서 당내 후보경선 과정이 문제됐다.

총체적 선거부정였다는 진상조사단의 발표, 사태 처리를 둘러싼 당 운영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의에서의 회의진행과 폭력사태 등은 후보선출뿐만 아니라 회의 등 당 운영의 전반에 걸쳐 통합진보당의 민주주의가 고장났다고 세상에 폭로했다. 세상은 민주주의로 뜨겁다. 왜 이럴까. 지금 세상에서 권력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1인 1표가 지배하는 국가나 단체에서 그 권력은 다수 인민의 표로서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인민을 지배하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니 이 민주주의는 노동운동에서도 문제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의 기술, 즉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로서 민주주의, 권력이 인민의 의사와 자신을 일체화시킬 수 있는 거처로서의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노동운동조차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에서 권력과 노동자의 관계를 살펴보라. 이 세상에서 권력자와 인민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의 선출과 그 권력 행사의 방식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세상이 민주주의 문제로 들끓고 있을 때 노동운동은 그것을 자신의 민주주의 문제로 살펴야 한다. 나아가 그 민주주의의 작동상의 문제, 즉 민주주의가 고장난 것을 넘어 노동자가 주인되는 민주주의를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노동운동은 그렇지 못하다. 어디서든 노동운동은 권력의 근거로서 민주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부정 앞에서 그 부정을 부정하겠다고, 고장난 민주주의를 바로 잡겠다고 허우적대면서 권력의 근거를 붙잡고 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노동운동 자체의 문제로 붙잡지 못하고 있다. 고작 민주주의혁명 단계에서 실현할 과제목록으로 접근했던 노동운동의 유산으로 인해 민주주의를 노동운동 자신의 과제로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니 노동운동 내부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교육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인민의 기술로서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권력의 기술로서 작동하고 있는 현실 민주주의의 원리조차도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다.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노동자대중의 운동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노동자세상을 쟁취해 주는 누군가의 운동이라면 그것은 이미 노동운동이 아니다. 그저 노동자를 위한 그 누군가의 운동이다. 그 누군가는 선진노동자 아무개일 수도 있고 대통령·장군·위원장일 수도 있다. 그가 누구라도 그것은 노동운동이 아니다. 노동운동의 사칭일 뿐이다. 그러니 노동운동사는 이제 노동자대중의 자기 운동으로서 다시 쓰여질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대중을 일으켜 세워서 그들의 힘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운동에서 민주주의는 노동운동이 쟁취해야 할 국가의 일이 아니라, 노동운동 자체의 일이어야 한다. 아무리 민주주의로 세상이 시끄럽고 민주주의가 춤추고 있다 해도 노동운동은 자신의 민주주의를 들여다봐야 한다.

어차피 비약은 없다. 질적 변화를 말하지만 그것도 비약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문제의 극복을 통한 사물의 변곡점일 뿐이다. 한 사람이 깨쳐나가는데 비약이 있었던가. 그랬다면 유치원에서 대학으로 월반한다고 유치원마다 대학진학반을 설치하고 난리였을 것이다. 하나를 넘어서 다른 하나를 넘게 된다. 어제의 문제를 풀고서야 오늘의 문제를 대면하게 된다. 사람의 의식이 그렇다. 한 사람이 이럴진대 사람들의 집합체, 이 세상의 일은 더욱더 그렇다. 한 사회는 그 세상의 문제에 부딛쳐 해결하고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민주주의도, 노동운동이 꿈꾸는 노동자세상도 그렇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주인되는 기술이다. 비록 제대로 성숙되지 못해서 지금은 권력이 인민을 지배하는 기술에 그치고 있다 해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개념이다. 그러니 인민이, 노동자가 스스로 주인되려는 의지를 갖고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주의에 비약은 없다. 음모적으로 몇몇 선진분자의 일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인민의 일이 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지체된 인민의 의식이 운동을 지체시키고 만다. 지도라는 말로서 인민의 일을 지도자의 일로 갈음해 버리면 결국 운동은 인민의 것이 되지 못하고 지도자의 것이 돼 버린다. 지도자의 운동, 그건 노동자세상이 아니라 지도자세상을 꿈꾸고 실현하고 만다. 그 운동이론은 과학의 언어를 구사해서 지도자의 운동을 떠받들고 인민의 운동을 경멸하느라 바쁘고, 지도자의 세상을 인민의 세상이라고 그려 대느라 정신이 없다. 지금까지 많은 노동운동의 이론이 이랬다.

2. 통합진보당 선거부정 사태. 이 나라 노동운동은 이 사태를 통해 민주주의를 배워야 했다. 노동자의 친구와 노동자 자신을 낱낱히 해부해서 문제를 들춰 내고 그것을 대중적으로 극복해야 했다. 낡은 것이기 때문에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통합진보당은 분명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당 내부 공직선거 후보경선을 당원 전체의 투표로서 치러 내고자 했고, 그것은 분명 낡은 것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은 언제라도, 무엇이라도, 오늘의 문제를 극복하고서 노동자의 내일을 열어야 하는 운동이다. 낡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라도 인민이 주인되는 민주주의를 위해, 그 수준을 떠나 민주주의를 부정하고서 권력의 기술로 작동하는 모든 것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에 관해 마땅히 당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자신의 문제로 이번 사태를 봐야 했다. 그러니 당의 문제해결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 자신의 문제해결이 될 수 있도록, 이번 사태에서 노동운동에서 어떻게 민주주의가 고장났던 것인지 낱낱히 밝혀내고 인적으로 제도적으로 극복했어야 했다. 그러면 이번 사태가 이 나라 노동운동의 위기가 아니라 한 걸음 전진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했다. 통합진보당이 혁신된다면 지지하겠다고 조건부 지지를 민주노총이 결의하고서 쇄신하라 지켜보겠다 한 게 고작이었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대중의 운동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에 대한 대응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그렇지 못했다. 노동자대중의 운동이라면 문제를 들여다보고 해결하는 것도 노동자대중의 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조직의 일, 대표의 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한 노동자 자신이 아닌 조직·대표의 문제로 보게 되고 노동운동에서 지도의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그것은 선진분자의 꿈, 노동자대중을 하루아침에 비약시킬 수 있다는 망상의 거처일 수 있다.

3.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민주주의를 자본과 권력에 맞서 쟁취해야 할 과제로 취급해 왔다. 더구나 자본의 문제는 계급의 문제, 그것은 소유의 문제로 파악했으니 결국 민주주의는 권력에 맞선 국가의 일로 인식됐다. 일반 민주주의니 부르조아 민주주의니 해서 낮은 수준의 과제로 인식했다.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노동자 내부의 민주주의는 그 수준의 높고 낮음을 떠나 당면한 투쟁에 밀리고 엄중한 상황을 탓하며 외면당했다. 결국 노동운동은 민주주의를 새롭게 세워내지 못했다. 낮은 수준의 것이라고 스스로 폄하하던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구호 앞에서 노동자세상이라 자칭하던 현실 사회주의는 무너졌다.

오늘 자본의 세상은 분명히 권력의 기술로서 민주주의로 존속한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꿈꾸는 노동자의 세상은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 오늘도 노동운동은 노동자대중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운동을 꿈꾸고 실현해 나가야 한다. 노동운동에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국가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다. 자신의 영토에서 꽃피워야 할 자신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지금 노동운동이 정체되고 있다면, 그것은 자본과 권력에 맞선 노동자권리 확보에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운동의 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노동운동이 노동자 자신의 운동으로 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노동자대중이 단순히 지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지, 지금 노동운동에서 민주주의를 물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조직과 활동 방식을 돌아봐야 한다. 노동운동에서 노동자가 민주주의를 노래할 수 있다면 노동자는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단순히 노동운동이 쟁취해 줘야 할 과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노래는 노동운동 자신의 노래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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