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필 고용노동부장관은 지난 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101차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이 장관은 논어 계씨편에 나오는 경구를 인용했다. ‘백성은 가난한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불공정한 것을 걱정한다(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

이 장관은 이어 “대부분의 문제는 공정하지 못하거나 과도한 격차에서 나타난다”며 “비정규직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해소와 취약계층의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장관의 연설은 ILO의 ‘좋은 일자리’ 정책과 맥락이 같다. 그간 ILO는 회원국가에 일자리의 양뿐만 아니라 질도 중요하다며, 지속가능한 일자리의 창출을 주문했다. 이런 ILO의 정책에 호응해 이 장관이 일터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주장한 셈이다. 동시에 이 장관은 차별 해소에 관한 우리 정부의 인식 정도와 그 노력을 알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관의 발언만큼 정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있을까.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 장관이 기조연설을 하는 사이, 우리 정부에서 일하는 무기계약직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중앙행정기관 무기계약직노조들은 지난 5일 국회 앞에서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라며 정부에 차별 철폐를 요구했다. 여기에는 경철청주무관노조·공공연맹 전국통계청노조·국토해양부 민주통합노조와 함께 공공운수노조 고용노동부사무원지부도 참여했다. 국제기구에서 차별 해소를 강조한 장관과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소속 부처 직원의 상반된 모습이 연출된 셈이다.

이들 노조가 기자회견을 연 이유는 이랬다. 지난 2007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이 발표된 후 정부 또는 공공기관 기간제 계약직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근속기간이 31년이나 된 기간제 계약직도 여기에 포함됐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됨에 따라 공공부문 비정규직들은 고용불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무기계약직으로 바뀌었지만 이들의 인건비는 여전히 정부 각 부처의 사업비에 편제됐다. 각 부처의 공무원 정원에 반영되지 않았다. 임금과 근로조건도 나아진 게 없다. 승진은 꿈꿀 수도 없다. 이들의 주장처럼 “무기계약직은 유령”일 뿐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른바 ‘중규직’이다.

정부는 무기계약직을 공무원 정원에 반영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무기계약직이 국가 고유사무를 수행하는데도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사업비 절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임금과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 해소는 아예 검토조차 하지 않는다. ‘유사·동종 정규직과의 불합리한 차별을 해소한다’는 취지는 무기계약직에게 그림의 떡이다.

정부의 태도에 항의해 이들은 ‘중앙행정기관 무기계약직 공동투쟁연대(공투련)’를 결성했다. 중앙행정기관 무기계약직은 약 18만명으로 추산된다. 공투련은 19대 국회에 기대를 걸고 있다. 신분 보장과 차별 해소를 위해 국회가 나서달라는 것이다.

무기계약직의 인건비를 사업비에 포함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법’이다. 정부도 이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을 했음에도 인건비는 한시적인 성격을 갖는 사업비에서 집행된다면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무기계약직이 고용불안에서 벗어나도 신분이 애매한 이유다. 공무원도 아닌데 그렇다고 비정규직도 아닌 신분인 것이다. 때문에 무기계약직들은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겉돌 수밖에 없다. 그들이 거리에 나가 차별 해소와 신분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정부는 언제까지 무기계약직을 그들만의 리그에 묶어 두고 차별할 것인가.

말한 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 대표가 국제기구에서 발표한 내용인 만큼 허언이 돼선 안 된다. 차별 해소를 주장한 정부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이 장관은 주무부서 무기계약직의 차별 해소와 신분 보장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장관의 연설은 신뢰성이 없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