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지난 3월 충북 단양읍에서 열린 금융노조 상임간부 워크숍 행사장에선 재미난 난센스 퀴즈가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지난해 가장 눈물 나게 투쟁했던 지부는?”이라는 물음이었는데, 정답은 ‘농협중앙회지부’였다.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분리(신경분리) 저지투쟁을 벌이면서 겪은 억울함과 분노를 담은‘눈물의 투쟁사’로 유명해진 허권 위원장(48·사진)을 빗댄 것이다. 그러나 신경분리는 이뤄졌고, 상황은 훨씬 악화됐다. 정부는 1천6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명목으로 농협중앙회에 경영개선계획 이행약정서(MOU) 체결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허 위원장이 단식을 택한 이유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1일 오전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허 위원장을 서울 충정로 농협중앙회 본점 로비에서 만났다. 지난달 29일부터 단식농성 중인 허 위원장은“위원장이 아닌 한 사람의 조합원으로서 너무 원통하고 분하다”는 말을 수차례 되풀이했다.

- 농협중앙회가 정부와 경영개선계획 이행약정서를 체결했는데.


“졸속적이지만 기왕 신경분리가 이뤄진 만큼 조직안정화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농림수산식품부가 법으로 정하고 있는 ‘자율 보장’ 조항까지 어겨 가며 이렇게 나서는 이유를 모르겠다. 경영간섭은 물론 내부 노사관계 영역까지 발을 디디려 하고 있다. 이 같은 무리수를 두는 것은 결국 300만 농민을 수하로 두겠다는 의도다. 위원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뿐이다. 사측은 노조가 수십 차례 요구하고 있음에도 MOU 문서 원본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 농협중앙회는 정부가 제시한 초안에서 구조조정의 우려가 있는 내용은 드러냈다고 하는데.

“물리적으로 ‘인력’이나 ‘구조조정’이라는 내용은 삭제됐는지는 몰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경영 효율화’라는 문구에 담긴 의미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MOU 안에서 정부와 농협중앙회의 관계는 갑과 을로 설정돼 있다. 또 MOU 이행 과정에서 상황이 농식품부의 입맛에 맞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노예로 만드는 계약이다. 구조조정의 우려가 없다는데, 우리가 지금껏 정부와 사측에 한두 번 속았나.”

- 사측은 정부 보조금 유치와 신경분리 촉진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경분리의 취지는 경제사업을 활성화시켜 농민들에게 실익을 주자는 것이다. 농협법에도 정부가 이를 위해 보조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렇다면 이 보조금을 고스란히 신경분리 활성화에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왜 MOU의 빌미가 돼야 하나. 조합원들이 피땀을 흘려 당초 신경분리 부족자금 12조원 중 6조원을 자체적으로 마련했다. 우리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해 개혁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나머지 6조원을 지원하겠다는 애초의 약속도 변질시켜 놓고도 농협을 지배하려 한다.”

- 정부가 MOU 체결을 밀어붙인 이유는 뭐라고 보나.

“농식품부가 우리를 간섭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것만 해도 지금껏 감당하기 어려웠다. 신경분리는 부문별로 법인이 분리되고 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조직구조가 바뀌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부는 이럴 경우 자신들의 존재감이 감소할 것으로 우려하는 것 같다. MOU 체결로 신경분리 이후에도 조직을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 쟁의행위 찬반투표 결과 조합원 96% 이상이 찬성했다.

“예상한 수치다. 위원장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번 일은 너무나 분하고 원통하다. 조합원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현 정부와 경영진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 이런 정서가 투표 결과로 드러났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정시 출퇴근이나 프로모션 거부 등과 같은 준법투쟁을 진행 중이다. 노동자로서 할 수 있는 반항은 모두 다 할 것이다. 높은 찬성률 때문에 든든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겁다. 전체 조합원 모두가 MOU를 되돌려 놓으라고 한목소리를 낸 것이니 말이다.”

- 앞으로의 투쟁계획은.

"당장은 서규용 농식품부장관으로부터 ‘노조와 합의 없이는 MOU 체결을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민주통합당의 움직임을 지켜볼 것이다. 김문호 금융노조 위원장과 함께 산별 차원의 대응책도 논의 중이다. 수위 높은 얘기도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말할 단계는 아니다. 일부에선 내부적으로 8월로 파업일정이 잡혔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MOU 철회가 파업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신경분리를 관통하며 그동안 노조가 내부적으로 쌓아 왔던 요구와 주장을 한꺼번에 터트릴 것이다. MOU는 '관치금융과 노동탄압'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기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건이다. 노동계 전체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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