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고자 복직은 노조의 자존심 문제"


국민연금관리공단 해고자 김화성씨는 아직도 12년간 복직투쟁을 벌여온 '그 곳'에 있다. 김화성씨는 현재 국민연금노조에 채용돼 상급단체인 공공서비스노련에서 정책차장으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은 늘 기쁜 모양이다. 홍대 근처 식당에 앉자마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신경쓸새도 없이 12년 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1987년 6월항쟁 뒤 대한민국 전체가 민주화의 열기로 뒤덮여있던 1989년 7월7일 국민연금노조도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사내민주화를 위해 파업에 돌입했다. 그때가 국민연금공단이 설립된 지 1년11개월만이었고, 노조가 설립된지도 겨우 8개월만이었다. 김화성씨에게는 대학을 졸업하고 얻은 첫 직장이었고 첫 노조생활이었다. 그 와중에 처음에 쟁의부장을 맡았던 '친구'가 약혼녀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해 김화성씨가 쟁의부장을 하게됐다. '운명의 장난(?)'이었다.

국민연금노조(당시 위원장 정현명)가 89년 7월7일부로 전면파업에 돌입하며 직장점거에 들어간지 34일째. 옥외집회를 마치고 명동일대 가두행진을 벌이던 도중 백골단이 투입되며 김씨를 포함해 조합원 150여명이 강제연행됐다. 정현명 위원장, 유병서 사무국장, 김화성 쟁의부장은 구속됐으며, 이들을 포함해 40명이 해고됐다. 한 달을 더 끌었던 파업은 그해 9월7일 타결, 파업을 마무리하고 다들 복직됐으나, 정현명 위원장, 유병서 사무국장, 김화성 쟁의부장은 '해고자'로 남았다.

유죄가 확정된 대법원 최종판결까지 형사재판은 다음해 10월, 민사재판은 1992년에 끝났다. 해고무효 확인소송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전면적이고 배타적인 직장점거는 위법하다'는 판례를 남기고 끝났다. 김씨는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으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공단 규정상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자'로 복직이 어려워졌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때 사면됐으나 그후에도 복직은 쉬 이뤄지지 않았다.

김씨는 당시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복직투쟁을 벌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95년까지 노조활동을 하며 매년 "이번엔 되겠지" 생각했는데 벌써 12년째가 된 것.

김화성씨는 당시 파업을 함께 벌였던 동지들의 배려로 지난 95년부터 공부를 시작, 지난해 4전5기로 노무사 시험에 합격해 현재 연수를 받고 있기도 하다. 복직을 하게되면 우선 업무를 해보고 싶다는 것 외에 생각나는 것이 없는 것처럼 김씨는 노무사가 된 후에도 뭘 하겠다고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지금까지 복직투쟁에 힘이 돼줬던 동지들까지 이제 "갈 길을 가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결혼을 못했다"는 김씨. 얼마전부터 만나고 있는 한 여성도 "이 사람이 노동운동을 할까? 노무사를 할까?"하는 눈치란다. 그렇지만 김씨는 복직이 되든 노무사를 하든 언제나 노동운동 현장에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단호하다.

20대 후반에 겪은 파업으로 인해 해고자로 40대를 맞이하는 김화성씨가 생각하는 복직의 의미는 뭘까?

"해고자 복직은 노동운동의 자존심이 걸린 문젭니다. 노조의 정체성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고요. 해고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회사도 노조를 우습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너도 짤릴래?' 이거죠. 다른 일을 한다해도 복직이 된 다음 당당히 사표 쓰고 시작할 겁니다"

김화성씨가 노조 지방본부 행사까지 챙겨가며 사람들 만날 때마다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복직기회도 있었다. 95년 국민연금노조는 정말 "목숨을 걸고" 해고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 당시 회사쪽은 직선간부이면서 '강성'으로 찍혀있는 정현명 위원장과 유병서 사무국장이 복직포기 각서를 쓰면 김화성씨는 복직시켜주겠다는 카드를 내놨다. 그러나 "해고자문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도저히 노조가 해서는 안될 일"이었기 때문에 과감히 회사쪽 제안을 거절했다.

김화성씨도 12년간 포기하고 싶었을 때가 왜 없었을까? 감옥에서 석방돼서 나왔을 때 백발의 모습으로 그를 맞았던 어머니를 볼 때마다 생기는 약한 마음을 어떻게 다잡았을까?

자신은 다른 해고자에 비해 운 좋은 해고자라고 말하는 김화성씨는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노조를 탈퇴하면 승진까지 시켜주는 회사쪽의 탄압에 맞서 95년까지 노조를 지켰던 70여명의 조합원들. 그들은 김화성씨가 해고된 이후 매달 50만원씩 생계비를 보태줬다. 민주노조 사수보다도 더 뜨거웠던 동지에 대한 책임과 정이었다.

김화성씨는 노조활동을 중단했던 95년 이후에도 국민연금노조의 단체교섭이 있을 때마다 공부를 때려치고 달려가서 복직관련 교섭에 임했다. 올해도 그렇게 매달려 볼 계획이란다.
"노조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해고자 문제를 해결해야만 다른 부분도 관철시킬 수 있다."

김화성씨의 신념이 올해는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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