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요즘 기분이 영 신파조다. 주변 지인이나 활동가들 중에서 쓰러지거나 몸이 아픈 이들이 많아서일까. 이병우 전교조 서울지부장·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이종탁 산업노동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20대 청춘부터 중년의 시간까지 자기 한 몸 돌볼 틈 없이 운동에 헌신해 온 동지들이다.

존경하는 노동운동가 병우형이 병상에 누운 모습을 망연히 지켜봤다. 늘 최강동안으로 밝게 웃으며 특유의 친화력과 낙천성으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던 그가 20여일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치를 온몸으로 일군 이재영 동지도 대장암으로 힘겨운 투병을 하고 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가 진창에 빠지니 알토란 같은 동지들의 몸과 마음도 함께 무너지고 있는 것인가.

8년 전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을 때 나는 담담했는데, 아내가 많이 놀랐다. 수술 후 입원해 있으면서 가장 소중한 가족을 왜 그리 소홀히 여겼는지 후회가 많았다. 솔직히 아프니까 동지는 한 다리 건너고 아내가 종일 곁에서 간병하면서 고생이 많았다. 참 미안했다. 남자가 군대 가면 효자 된다는데 딱 그 모양이었다. 이후 2년여 동안 속죄하는 심정으로 아내와 아들, 여동생과 매제들, 처남과 처제 모두에게 매주 월요일 ‘평생지기 통신’이란 이름으로 시 한 편씩 동반한 이메일을 썼다. 내 삶의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그때는 분명했다. 사랑하는 이들인 가족·친구·동지와 오래도록 함께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양식이 최우선이었다. 건강을 위한 금주·금연, 긍정적인 마음가짐…. 건강을 되찾으니 금방 도루묵이 돼 편지는 고사하고 잦은 음주와 늦은 귀가로 아내의 원성을 다시 사고 있지만.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를 위해 힘써 온 활동가들에게 건강은 늘 뒷전이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하는 게 상식임에도 우린 늘 사후약방문이고, 무대책으로 일관하면서 사람의 소중함을 쉽게 뇌까리곤 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면서도 자중자애할 새 없이 늘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해 온 우리 자신의 일상적 악습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했다. 노동운동·비정규직운동·진보정치운동의 최우선 원칙은 노선과 사상에 앞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임에도, 정작 나 자신조차 돌보지 못한 채 거대담론의 허상에 사로잡혀 치달아 온 건 아닌지 뼈아프게 되돌아본다.

노동해방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희구하며 운동을 하는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 바로 지금 서로에게 어떤 사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 아픈 동지들을 보며 자문해 본다. 절실한 심정으로 몸과 맘이 아픈 동지들의 쾌유와 회복을 기원하면서 시 한 편 띄운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