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산업 직원의 비알코리아로의 소속 전환을 추진한다. 단, 직접고용 시기와 방법은 10일 이내에 노사가 합의해 결정한다."

지난달 18일 충북지방노동위원회에서 깜짝 놀랄 만한 합의서가 나왔다.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생산하는 비알코리아의 총괄부사장과 하청기업인 서희산업 사장, 서희산업노조 위원장의 서명이 담긴 이 합의서는 딱 두 줄뿐이지만, 현대자동차도 하지 못한 '원청의 하청노동자 전원 직접고용'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하청노조가 파업을 철회하자마자 원청인 비알코리아는 입장을 확 바꿨다. 고용 시기와 방법을 열흘 이내에 합의하자던 비알코리아는 "5년 뒤 사회분위기가 성숙해지면 논의해 보자"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하청노조인 서희산업노조가 이달 9일 파업에 들어간 까닭이다. <매일노동뉴스>가 22일로 파업 14일째를 맞은 서희산업노조의 파업농성 현장을 찾았다.

11년 전에도 지키지 못한 약속

김종구(43)씨는 충북 음성 삼성면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넘어 다니던 첫 직장은 중장비 생산업체였는데, 외환위기 때 부도가 나서 지금은 사라졌다. 99년 김씨는 고향에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비알코리아 아이스크림공장에 취직했다. 과수원 담장을 사이에 두고 노란색으로 벽면을 칠한 공장은 딱 보기에도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나올 법하게 생겼다. 툭 튀어나온 지붕 위에는 핑크와 블루가 귀엽게 섞인 BR이라는 이니셜이 선명했다. 이곳에서 그는 13년째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원료공급 업무를 맡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공정은 세월이 갈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생크림에 바닐라 원료만 넣으면 되지만 슈팅스타처럼 알갱이가 들어가는 아이스크림은 또 다른 원료들을 제때 배합해야 한다. 요즘 나오는 '엄마는 외계인'이나 '사랑에 빠진 딸기' 같이 3개 이상 믹스(재료)가 들어가는 아이스크림은 최고 난이도에 속한다. 입안에서 얼음이 씹히지 말아야 하고 골고루 재료가 어우러져야 맛이 난다. 적당하게 얼린 재료를 섞는 타이밍이 관건이다.

그렇게 한결같이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온 김씨는 비알코리아 정규직이 꿈이다. 입사 당시에는 비알코리아 정규직으로 채용됐지만 2001년 아이스크림공장 하도급 방침에 따라 하청업체인 서희산업 소속 직원이 됐다. 당시 서희산업 소속으로 넘어갈 때 지금 상황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다닌 회사가 하청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자신이 하청노동자의 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알코리아 총무팀 부장이 하청업체인 서희산업 초대 사장을 맡으면서 약속했어요. 한 치의 손해도 보는 일 없게 하겠다고요. 원청사와 똑같이, 아니 그 이상의 대우를 해 주겠다고 '나만 믿고 따라오라' 하더군요. 그런데 원청에서 하도급 주는 목적은 하나잖아요. 인건비를 줄이거나 구조조정을 하거나 세금을 피하려는 것이니까요. 걱정이 많았죠."

그때는 노조가 없었다. 회사는 개별면담을 하면서 전적동의서를 받았다. 김씨도 쫓겨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서희산업으로 옮기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원청기업과 한 치의 차별도 없게 대우하겠다"던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3년째 근속한 김씨의 임금은 현재 비알코리아의 초임 수준이다.

이강윤 서희산업노조 위원장은 "비알코리아 초임 기본급이 140만2천원인데, 서희산업은 15년 된 노동자의 임금이 142만원"이라며 "회사가 올해 14% 임금인상에 합의해 원청의 97%까지 임금수준을 맞췄다고 주장하는데, 근속연수를 감안하지 않고 원청 초임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이중삼중 임금차별 당하는 하청노동자

2006년 이후 입사한 하청노동자들은 이중삼중의 임금차별을 겪고 있다. 장원재(29)씨와 전상희(38)씨는 아이스크림공장 물류팀에서 생산된 아이스크림 통을 지게차로 옮기는 업무를 한다.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냉동고에서 일하는 관계로 한여름에도 얼굴이나 코에 동상이 걸린다. 똑같이 힘든 일을 하지만 임금은 1천500만원 넘게 차이 난다.

회사가 2006년 이후 입사자에게 연봉제를 적용해 각종 상여금과 수당을 없애 버린 탓이다. 먼저 입사한 전씨는 시급제 적용을 받고 상여금도 700% 수준인 데 반해 뒤늦게 입사한 전씨는 상여금 300% 외에는 수당을 받지 못한다. 임금차별 문제가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이자 최근 회사는 시급제 대상자의 호봉승급분과 근속수당마저 없앴다. 이는 노조 설립의 주요한 이유가 됐다.

“아이스크림 생산자 속여 파는 비알코리아”

파업 돌입 이후 노조는 비알코리아 아이스크림공장 정문 앞에 7개의 천막을 나란히 세웠다. 이날 오후 3시 무렵, 굳게 닫힌 정문 쇠창살의 자물쇠가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회사가 고용한 대체인력으로 보이는 청년 두세 명이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비알코리아는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대체인력을 모집했다. 대체인력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채용해 이주노동자들도 이따금 눈에 띄었다. 조합원들이 빠진 공장은 비알코리아 정규직과 서희산업 관리직, 대체인력들로 메워졌다. 이강윤 위원장은 “매장에서 판매하는 아이스크림 통에는 버젓이 조합원들의 이름이 ‘생산책임자’로 적혀 나간다”며 “보건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대체인력이 만드는 아이스크림으로 소비자를 우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파업 14일째 손해배상 청구액만 34억원

서희산업은 대체인력 투입으로도 모자라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파업에 돌입한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노조 앞으로 회사가 작성한 손해배상 청구서가 날아온다. 회사는 법원에 소송을 넣는 대신 노조 앞으로 생산차질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다. 이날 현재까지 34억4천900만원에 달한다. 조합원 개인에게도 청구서가 날아간다. 회사는 공장 바로 앞에서 3년째 살고 있는 이은정씨에게 청구서를 보냈는데, 주소지는 그의 고향집으로 돼 있었다.

"어머니는 고혈압을 앓고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근근이 살아가시는데 강원도 삼척으로 1천180만원을 물어내라는 손해배상 청구서를 보낸 거예요. 부모님이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싶어 전화를 했더라고요."

회사는 노조의 파업을 불법으로 보고 있다. 충북지노위 조정안 수락으로 노사가 올해 임단협을 타결했는데, 노조가 이를 깨고 불법적으로 파업에 돌입했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조기두 한국노총 조직본부장은 "회사가 불법파업 운운하는데 이는 자가당착"이라며 "원청이 노사합의를 휴지 조각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비난했다. 비알코리아 관계자는 "여러 절차가 필요한데, 노조가 협상을 하다 파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렇다고 접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사 모두 비알코리아가 속한 SPC그룹 계열사인 파리크라상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사례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크라상은 200여명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지난해와 2010년 2년 연속으로 고용노동부가 선정하는 ‘고용창출우수기업’에 뽑혔다. 파리크라상은 비정규직 전원을 정규직화한 것이 아니라 판매직 등에서 능력이 검증된 우수인력만 추려서 정규직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알코리아도 "서희산업에서 역량이 검증된 인력에 대해 소속전환을 검토해 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노조는 "원청이 직접고용을 합의해 놓고 지키지 않는 게 문제"라며 "선별적 전환방식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다"고 강조했다.

노조 파업 2주일을 넘긴 가운데 비알코리아는 아직도 '5년 뒤 사회분위기가 성숙할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10년 넘게 차별로 고통 받은 하청노동자에게 또다시 기다리라는 말은 가혹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들이 불법파업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리로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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