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진보만큼 반정치적인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조차 자신은 ‘정치적’이거나 ‘권력적’이지 않다는 말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고, 정치의 본질인 권력을 선용할 수 있도록 실력을 쌓고 자신감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다. 진보정치 주변에서도 유사한 정조가 강하다. 진보정당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정당이 아니라 운동”을 외치는 사람이 많고, 운동적 순수성 내지 진정성을 앞세우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을 질타하는 경우도 자주 본다. 다른 정치, 새로운 진보정치, 진정한 진보를 말하는 사람도 많다.

오래 전 마키아벨리가 말한 것이지만 인간의 정치가 대면하고 있는 고민은 오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겪고 보아 온 정치, 그것이 앞으로도 우리가 해야 할 정치이고 그 속에서 좀 더 진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실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일뿐, 다른 건 없다. 정당을 어떻게 운영해야 다양한 이견이 공존하면서도 체계와 조직으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당의 정책 능력과 교육 기능을 어떻게 확대할 수 있고, 당원들이 활기찬 당 생활을 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시민사회와 의회 나아가 국가관료제와 마주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사회의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권능을 더 강하게 실현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을 다루면서 가능성의 공간을 확장해 가는 것이 정치이지, 누군가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 정치를 새로 하면 잘 될 것처럼 말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정치를 우습게 아는 태도가 아닐 수 없는데, 설령 새로운 정치를 하게 된다 해도 대면하게 될 문제는 다르지 않을 것이며 ‘당권파’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이고 악순환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파 때문에 문제라는 말도 많이 하는데 그것 역시 인과적으로 잘못된 이해방법이다. 파당을 짓고 정파를 만드는 일은 인간의 정치적 본성에 가까운 현상이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과 싸우면서 자연스럽게 정파가 등장했고 또 유익한 측면도 많았다. 그것은 감시와 탄압을 피해 저항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는 심리적 지지대의 역할도 했으며, 서로 신뢰하는 운명공동체로서 편안함을 갖게 했다. 문제는 민주화가 되고 진보적 대중정당의 공간이 열렸을 때 발생했다. 안정된 리더십을 구축하고 조직의 공식 결정기구를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하면서 참여와 대표, 책임성의 원리가 실천되는 다양한 제도와 조직 문화가 성장했어야 했는데, 이 과제들에서 성과를 내는 데 실패하다보니 진보정당이 잘 조직된 정파들의 사냥터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요컨대 문제의 핵심은 정당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결과적으로 정파가 전횡하게 된 데 있고, 따라서 정파의 폐해를 극복하는 문제 역시 정당을 제대로 만드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했듯 ‘현대판 군주(modern prince)’라 할 수 있다. 정당이 제자리를 잡은 뒤에는 합리적 제도와 절차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겠지만, 정당을 그렇게 만드는 형성기 내지 전환기에는 강한 리더십이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스웨덴의 진보정당 역시 수권 정당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당 리더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20년에 가까웠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중심 문제는 좋은 통치자를 뽑는 것에서 시작된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메디슨이 강조했듯 “먼저 통치를 가능케 하고 사후적으로 통치가 자의적이 되는 것을 통제”해가는 접근 없이 어느 조직도 성과를 낼 수 없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마따나, “리더십이 없는 민주주의는 관료본능이 아니면 도당들의 지배로 귀결될 뿐”이다. 권력은 가시적일 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강력한 리더십 없이 강력한 대중권력은 불가능하다. 그럴 경우 당은 보이지 않는 정파 권력들의 놀잇감으로 전락한다. 이번엔 ‘경기동부’가 초점이 되었을 뿐, 낡은 정파 구도 위에 서 있는 정당의 틀을 바꾸지 않고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로마의 법 격언에 “무지는 용서되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정치에서 무능력은 변명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parsh03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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