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우람 기자

이틀에 한 번꼴인 폭언과 잦은 성희롱을 견디는 것이 직업인 이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중증 이상의 우울증에 걸려 있다. 이 중 80%는 당장 치료가 필요한 고도우울증 환자다. 늘 밝은 목소리로 ‘고객님’을 찾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사무금융연맹(위원장 박조수)이 16일 오전 서울 을지로1가 국가인권위원회 8층 배움터에서 ‘콜센터 상담원 노동인권 실태 및 법제도 개선을 위한 연구’ 토론회를 열었다. 박조수 위원장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함께 콜센터 노동자들의 노동실태와 조직화 방안을 연구했다”며 “현실이 참담한 만큼 정치권에서도 콜센터 노동자들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인식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성희롱 당해도 참아라?=연맹은 이날 토론회에서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공동으로 진행한 콜센터 노동자 노동실태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대상은 연맹 산하 금융사업장과 희망연대노조 산하 통신사업장의 콜센터 노동자 310명이다.

조사 결과 ‘과도한 스트레스’와 ‘자존감 훼손’을 호소하는 콜센터 노동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월 평균 16회 이상의 폭언, 월 1회 이상의 성희롱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흥미로운 것은 상용직과 직영 형태로 고용된 노동자일수록 이런 문제를 ‘참고 넘어가는’ 빈도가 높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고용구조가 불안정하다는 뜻이다. 업무 과정 역시 노동자들의 ‘인내’에 초점이 맞춰져 문제를 키우고 있다. "회사의 정책이 폭언을 들어도 무조건 사과하도록 돼 있는가"라는 질문에 78.7%의 노동자들이 "그렇다"고 답했다. 58.3%의 노동자는 성희롱을 당해도 회사의 방침상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반면에 회사에 스트레스 완화나 전문상담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겨우 10% 안팎에 그쳤다. 나날이 정교해지는 업무감시로 노동강도가 세지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콜센터 노동자의 절반 이상(64.0%)은 "사용자가 업무감시를 위해 컴퓨터를 활용한 실시간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통화내용을 수시로 점검받는 노동자는 무려 87.2%에 달했다. 대부분(88.5%) 업무 코치로 이어졌다.

정흥준 센터 정책위원은 “직업 환경적인 요인으로 콜센터 노동자들은 스트레스가 심하고,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였다”며 “기업 운영에서 콜센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높지만 사용자들은 사실상 노동자들을 방치하고 ‘못 버티면 나가라’는 식으로 대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인간적 캠페인부터 시작하자"=콜센터 노동자들은 조직화와 연대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권익단체가 작업환경 및 근로조건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87.4%가 ‘보통’ 이상의 답변을 내놓았다. 다만 향후 1~2년 내에 현장에서 노조가 설립될 가능성이 있냐는 질문에는 63.2%가 "10% 미만"이라고 답했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콜센터 노동자들의 고용형태가 대부분 계약직·아웃소싱 형태여서 사업장 종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남우근 센터 정책위원은 “콜센터 노동자의 경우 이직률이 높고 소속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업장 단위 조직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산별노조의 지부 형태나 지역별 조직화, 굳이 노조가 아니라 직업별 조직인 협회와 같은 형태를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화물연대가 유류세나 통행세 인하 등을 내걸고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조직화를 이룬 것을 고려해야 한다”며 “콜센터 노동자들도 장기적으로 제도개선 과제와 노동조건 향상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김진억 희망연대노조 위원장은 “간접고용 노동자는 고용보장 장치 없이는 조직화가 어렵다”며 “노조 설립 자체보다는 이후 어떤 비전을 보여 줄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콜센터 노동자들은 불만이 많음에도 노동자로서의 권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의자를’같은 캠페인처럼 인간적인 캠페인부터 시작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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