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주의가 부딪치고 있다. 당신이 서 있는 지금 이 순간 민주주의가 부딪치고 있다. 통합진보당에서 당권파와 비당권파는 당권을 두고서 충돌했다. 민주주의를 외치며 서로를 적대하면서 몰아내겠다 하고 있다. 정권심판을 내건 민주통합당도, 정권재창출에 나선 새누리당도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상대당과 싸우고 있다.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회의장의 단상을 점거하고, 머리채를 잡고, 폭력을 행사했고,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회의를 방해한 자들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 하고 있다. 지금 민주주의는 정파와 세력을 가르고, 당과 당을 나누고서 부딪치고 있다. 민주주의가 자신의 존재 이유고 정당성이고 자신의 행동의 근거로 내세우고 상대를 제압할 무기로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바야흐로 민주주의 전쟁이다.

2. 도대체 왜 상대를 제압할 무기로 모두 민주주의를 들고 있는 것일까. 진보의 당이든, 민주의 당이든, 보수의 당이든 모두가 민주주의를 자신의 무기로 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정파와 세력이든 모두 민주주의를 자신의 무기로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지금 정치의 장이면 어디서든 민주주의가 상대를 제압하고 권력을 차지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사업장, 즉 자본의 운동공간에서 자본이 태어나고 확대재생산된다. 정치의 공간에서는 권력이 태어나고 확대재생산된다. 그런데 자본은 자본의 힘으로 태어나고 확대재생산되지만 권력은 지금 민주주의로 태어나고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권력을 선출하는 원리이다. 한 나라에서 인민이 나라의 권력을 선출하는 기술이 민주주의고, 한 정당에서 당원이 당의 권력을 선출하는 기술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러니 권력은 민주주의로 인민을 지배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기술인 것이다. 지금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는 권력이 있는가. 무기의 힘으로 폭력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인민을 지배하는 권력일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민주주의를 말해 왔다. 민주주의야말로 인민을 지배하는 가장 유용한 권력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3. 폭력의 시대가 있었다. 그야말로 무기의 힘이 지배하던 인간의 역사가 있었다. 불과 몇백 년, 몇십 년 전이었다. 그 시대를 넘어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시대 권력의 대표가 왕이었다. 무기로서 정복하고 지배했다. 무기가 권력의 기술이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도 없었고 말해서도 안 됐다. 그리고 그 왕의 시대를 폐지하고서 새로운 권력이 세워졌다. 왕의 권력의 기술이 무기였으므로 그걸 폐지해야 왕의 권력을 빼앗을 수 있었다. 시민의 혁명에 의해서, 인민의 혁명에 의해서 시민의 이름으로 권력이 세워지고, 인민의 이름으로 권력이 세워졌다. 그 권력은 폭력·무기의 힘이 작동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서 세워졌다. 무기의 힘이 작동되면 왕의 권력이 되살아나고 자신의 권력이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민주주의가 새로운 권력의 기술이 됐다. 시민계급에 의해서 권력이 선출되는 민주주의를 근대국가의 작동원리로 시민헌법에 새겨 넣었다. 인민에 의해서 국가권력이 선출되는 민주주의를 현대국가의 행동원리로 현대헌법에 새겨 넣었다.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 1919년 독일혁명에서 ‘바이마르공화국 헌법’, 1918년 러시아혁명에서 ‘일하는 인민의 권리선언’에서 민주주의가 새로운 권력의 기술이라고 선언됐다. 이렇게 권력의 기술이 변경됐다. 더 이상 폭력·무기의 힘이 권력의 기술로서 용납될 수 없게 됐다. 그것을 권력의 기술로서 사용하는 자는 누구든 이 세상에서 추방돼야 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적으로 낙인을 찍혀서 권력에서, 정치의 장에서 퇴출됐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력의 기술이었으므로 누가 권력을 차지하도록 할 것이냐와 권력의 선출방법이 정해져야 했다. 어떠한 방법이든 그것은 인민의 국가적 법적 표현, 국민의 이름으로 대표됐다. 당연히 그 권력 선출방법을 침해하는 자는 용납해서는 안 됐다. 역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그 자는 추방당했다. 이 나라에서 4·19혁명과 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바로 이것을 인민의 의지로서 표현했다.

4. 지금 통합진보당 사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충돌했다. 당권파와 비당권파는 이 민주주의라는 무기를 쥐고서 자신이 당의 권력을 차지하고 상대를 권력에서 추방시키려고 했다. 사태는 이 민주주의가 견고함을 보여 줬다. 민주노동당·통합연대, 그리고 국민참여당이 통합한 통합진보당에서 이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절대이념일 수 있었고, 자신의 무기였으며, 권력의 기술이었다. 그런데 국민참여당계는 이번 사태 과정에서 이 민주주의의 수호세력으로 행세했다. 그들은 이 민주주의를 당 운영의 원리로 작동시키는 데 다른 정파에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권력의 기술로서 활용하는데 숙련돼 있었다. 정당활동과 국정의 경험은 이 민주주의에서 그들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 민주주의가 가장 치열하게 작동하는 당의 선거과정에서 그들은 이 민주주의가 고장난 것들을 주저없이 제기했다. 그것을 전국운영위원회와 중앙위원회 등에서 적절히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언어와 행동은 세련되게 이 민주주의를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이 생중계됐다. 통합 과정에서 진보의 당이 과연 국민참여당과 합당할 수 있느냐하는 논란이 있었다. 그럼에도 당권파는 이런 논란을 무릅쓰고서 그들과 통합했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졸지에 민주주의로 작동될 당에서 과연 당권파, 경기동부연합이라 불리우는 그들과 당을 함께 할 수 있느냐하는 것으로 그 논의의 지평이 바뀌어 버렸다. 그렇다. 지금 통합진보당에서 승자와 패자는 이렇게 민주주의로 갈린 것이다. 지금 비당권파, 그중 조준호·심상정·유시민, 그리고 정파세력으로서는 국민참여당계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선거부정의 당, 통합진보당에서 민주주의의 수호세력이라고 전국에 생중계로 보여 주고서 등장했다.

5. 철학의 근본문제가 세계의 해석과 실천을 갈랐다. 존재냐 의식이냐, 사람이냐 세계냐. 이것은 기존의 철학으로부터의 유물론의, 철학의 독립선언이었다. 자신을 새로운 철학이라 했고 기존의 철학을 낡은 거라 선언했다. 무엇이 1차적이냐에 따라 철학은 근본적으로 갈라졌다. 그러니 그것이 과학이든 아니든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선언인 것은 분명했다. 새로운 철학은 자신이 노동하는 인민의 세계관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노동운동의 철학이 됐다. 통합진보당사태.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권력의 기술로서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선거가 고장 나고 당의 운영이 고장 나고 말았다. 이 나라 노동운동이, 민주노총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서 만든 민주노동당을 법적 승계한 통합진보당의 사태는 지금 노동정치를 근본적으로 묻고 있다. 도대체 정치의 근본문제는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무엇이 정치의 해석과 실천을 가르는 것이겠는가. 권력(자)과 인민의 관계다. 권력(자)이냐 인민이냐. 이것은 권력기술로서의 정치로부터 인민의 정치를 세우는 독립선언이다. 무엇이 주인이고, 무엇이 지배하고, 무엇의 의지가 관철되는 것이냐에 따라 정치의 이론과 실천을 가른다. 여기서는 무엇이 1차적이냐 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철학의 근본문제와는 다르다. 그런 거라 말하면 투표장에 가는 것이 인민의 일이 되고 정치는 권력의 일이 되고 만다. 그런 문제라면 인민을 투표장에 몰아넣어 권력을 위해 투표하도록 하는 기술의 문제가 되고 만다. 지금까지 말해왔던 권력의 기술로서의 민주주의가 그런 거였다. 그러나 정치의 근본문제, 권력이냐 인민이냐는 그야말로 무엇이 주인이고 무엇이 노예냐의 문제이고, 주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노예가 돼버리는 존재의 문제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노예가 주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주인을 부정하고서야 노예는 복종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제 정치는 인민이 권력을 부정하고 인민의 의지가 세상의 의지가 되는 인민의 기술이어야 한다. 이 정치의 근본문제로 노동정치는 자신이 노동하는 인민의 정치라고 주장할 수 있다. 노동정치의 기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노동정치는 권력의 기술로서 민주주의를 폐지하고서 인민의 기술로서 민주주의를 제기하고 세워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 노동운동은 권력의 기술로서의 민주주의를 비판하지도 못했다. 대중적 진보정당을 통해서 고작 권력의 기술로서 민주주의를 활용하려다 지금 그 민주주의가 암초에 걸려 고장나서 함께 좌초하고 말았다. 어떻게 민주노총이, 이 나라 노동운동이 올라탄 배가 좌초에서 빠져나올 것인지 조합원들은 물론 이 나라 노동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이 좌초는 민주주의의 고장인 것이다. 그것이 권력의 기술로서 민주주의일지라도. 그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 거기서 노동운동이 주도하기 위해선 스스로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권력의 기술로서의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나설 때 약화되고 노동자가 주인으로 나설 때 폐기될 수밖에 없다. 그 방법이 그 시간과 공간에서 구체화될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그 방법을 실현할 노동의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다. 노동운동에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실험하고 세워 나가야 할 이유다. 지금 노동운동은 단순히 자본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운동은 자신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낡은 권력과 싸우고, 권력기술로서의 민주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 바야흐로 민주주의전쟁을 치루고 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노동자의 민주주의는 없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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