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좌초된 마당에 노동정치의 실종은 더 이상 화제도 아니다. 통합진보당 부정선거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고장 나지 않은 곳이 없다.

이번마저 소위 운동권에 만연한 낡은 패권주의와 오도된 승리지상주의의 폐습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진보정치는 재기 불능의 나락에 빠지게 될 공산이 크다. 초심과 원칙과 정신을 잃은 운동이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비루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비상한 노력과 각고의 투쟁이 요청된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진로를 원점에서 다시 모색하면서 한계가 명백해진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을 넘어 노동중심의 진보정치를 밑바닥에서부터 끈기 있게 추진해 가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진보정치가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줄 노동정치로 탈바꿈하려면 임기응변이나 대증요법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를 바꿔 낼 새로운 주체가 형성돼야 한다.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일대변화를 실제로 만들어 가는 것 외에 다른 편법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위기는 또 한 번 기회이기도 하다. 마지막일 수도 있지만.

900만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해결은 크게 두 가지 수준과 경로를 통해 이뤄진다. 하나는 입법에 의한 규율이고 다른 하나는 단체협약에 의한 규율이다. 가장 바람직한 경로는 당사자인 비정규 노동자들의 대규모 조직화를 통한 방식으로 미조직된 비정규 노동자들이 자주적 노동조합을 무기로 대중투쟁을 통해 단체협약을 쟁취하는 것이다. 조직대오를 확대하면서 문제해결의 범위를 현장에서부터 점차 넓혀 가는 것이다.

문제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선 장기투쟁을 불사해야 하는 어려움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 조직화만으론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한국은 기업별 노사관계 중심이다. 비정규직의 경우 노동조합과 단체협약 적용 모두에서 대다수가 배제되기 때문에 입법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더욱 크다.

최저임금 인상과 적용을 비롯해 고용안정(직접고용 정규직화)·차별시정·노동3권 보장·사회안전망 구축 등 법·제도 개선은 수백만 비정규직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효력을 미친다. 조직화와 법·제도 개선이 시너지를 불러일으킬 방법은 없을까. 이 두 가지 경로가 하나로 모아진다면 그 효과는 배가될 수 있고 파장도 상당할 것이다. 그것이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요체다.

엊그제 현대자동차 원·하청노조 연대회의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핵심으로 하는 특별교섭 요구안을 만장일치로 확정했다. 건설노조와 공공노조 화물연대도 현안 해결과 특수고용 노동3권 쟁취를 위한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체 조직노동을 대표하는 투쟁으로 주목받은 건 오래 전 일이지만, 이제 비정규 노동자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 입법투쟁의 당사자로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주체로 나서야 한다. 노동정치의 실질적 성과인 법·제도 개선의 직접적인 수혜자인 비정규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대표성을 위임하지 말고 직접 나서야 한다.

지난 십수 년의 비정규직운동 역사 속에서 얻은 교훈의 첫머리는 계급주체로서 비정규직 주체의 형성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당사자운동이되 노동계급을 대표할 역량을 갖춘 운동세력으로서 비정규직 주체의 조직적 형성. 정규직노조운동의 퇴행과 정파운동의 폐해를 노동자 단결과 연대의 정신으로 혁파해야 한다.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기치를 움켜쥐고 자본에 맞선 계급투쟁을 선도하면서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주역이 되는 신진세력으로서의 비정규직 주체 형성. 이 주체 형성 없인 전투에서 몇 번 이길 순 있으나 자본과의 전쟁에선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처절한 비정규직 투쟁을 비롯한 지난 시기 노동자투쟁의 교훈이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정치세력화의 주체로까지 의미 있게 자리매김할 때 지금의 위기는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진보정치의 짙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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