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 기자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외롭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아무개(36)씨는 지난달 30일 홀로 살던 임대아파트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새벽 3시15분 23층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갈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서른여섯의 청춘에 ‘쌍용차 해고자’라는 꼬리표를 단 그는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세상 누구도 죽음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스물두 번째'라는 끔찍한 숫자가 그의 죽음 앞에 붙여졌을 뿐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학살’이라고 말했다.

서울 대한문 앞에는 그를 위한 작은 분향소가 있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던 지난 25일 밤 <매일노동뉴스>가 김정우(54·사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지부장을 그곳에서 만났다.

2001년 대우차, 2009년 쌍용차서 두 번 구조조정

김정우 지부장은 두 아이를 둔 아버지이자 맞벌이 아내를 둔 남편이다. 스무 해 동안 기름밥을 먹으며 차를 고쳤다. 검은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은 쉰 줄에 접어든 평범한 노동자다. 그런데 부침이 심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그를 평범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89년 서울 강남 뱅뱅사거리에 있다가 지금은 사라진 정비공장에서 노조를 만든 친한 형들의 눈에 띄어 노조에 가입했다가 해고된 그는 90년 구로정비소에 특채로 들어가 쌍용차와 인연을 맺었다. 그를 쌍용차에 입사시켜 준 사람은 이제는 퇴직한 쌍용차의 고위간부였다.

“정비공장에서 일할 때 고객으로 만난 사람이었어요. 내 솜씨를 보고 쌍용차 구로정비소를 소개시켜 줬습니다. 오래 있었으면 사장도 했을 사람인데 나 때문에 결국 떠났어요. 나보고 노조활동 그만두라고 했죠. 내가 못 그만두니까 그분이 그만둔 거죠.”

김 지부장은 90년대 뜨거웠던 ‘구로’에서 세상에 눈을 떴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야학이나 역사교실을 다니며 알음알음 배웠다. 구로청년회를 다녔고, 이봉우 구로노동상담센터 소장이 운영하던 노동교실도 찾아갔다. 이후로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98년 쌍용차가 대우그룹으로 넘어가면서 쌍용차 구로정비소는 대우차 정비소로 옷을 바꿔 입었다. 대우차가 인력이 겹치는 정비·연구소 분야를 회사 간 전환배치하며 구조조정을 했기 때문이다. 대우차도 곧 위기를 맞았다. 2001년 인천 부평 산곡성당에서 대우차노조 지도부가 농성장을 차렸을 때 그는 조직3부장이었다. 김 지부장을 비롯한 정비노동자들은 회사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구조조정됐다. 98년 900명에서 600명으로, 2001년 쌍용차 독자경영 체제가 되면서 다시 324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2009년 쌍용차는 직영 정비소를 아예 분사시켜 버렸다. 165명이 희망퇴직을 했고 70여명은 정리해고됐다. '해고는 살인이다'는 말이 입에서 떠나지 않은 10년이었다.

“쌍용차 문제는 국가가 나서야 해결된다”

김 지부장은 "쌍용차는 국가의 문제"라며 "특별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쌍용차는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이어진 구조적인 문제예요. 쌍용차가 중국 상하이차로 인수됐을 때 참여정부가 투자는 하지 않고 기술만 훔쳐 가는 것을 눈감아 줬습니다. 상하이차 먹튀가 법정관리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회계조작이 분명히 있었다고 봐요. 검찰은 중국에 유출된 기술이 그저 '정비지침서' 수준의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하이브리드 기술개발을 지원했는데, 그것이 고스란히 털린 겁니다."

이명박 정부는 대테러진압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짓밟았다. 조현오 경찰청장 말대로라면 2009년 쌍용차 옥쇄파업 진압은 이명박 대통령의 승인하에 이뤄진 것이다.

"함께 살자고 요구했던 노동자를 국가폭력으로 학살한 게 쌍용차 진압작전입니다. 정부가 짓밟았으니 당연히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금속노조와 쌍용차지부는 올해 2월 박영태 전 쌍용차 대표이사를 비롯한 법정관리 관련자들을 형사고발했다. 노조와 지부에 따르면 쌍용차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던 2009년 1월 당시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이 작성한 감사보고서에는 유형자산손상차손 5천177억원이 회계조작으로 산출됐다. 유형자산손상차손액을 산출할 때 회수가능가액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를 의도적으로 배제해 쌍용자동차의 부채비율을 561%로 높였다는 주장이다.

"부채비율이 180%였던 멀쩡한 회사를 회계를 조작해 560%로 만들어 구조조정을 단행한 게 쌍용차 사태의 본질이에요."

"개표방송 차마 끝까지 못 봐"

김 지부장은 '차려진 밥상을 걷어찬' 4·11 총선의 개표방송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여소야대가 된다고 쌍용차 문제가 바로 해결될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스물두 명의 죽음을 한 사업장의 죽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연대의식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부풀려진 적자와 조작된 경영실적으로 이뤄진 구조조정"의 진상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대 국회에서 쌍용차에 대한 청문회와 스물두 명의 희생을 만들어 낸 책임자 처벌이 이뤄져야 노동자들도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이 조남호 회장이라는 개인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었다면 쌍용차는 중국·인도와 대한민국, 국가와 국가 사이에 걸쳐 있는 문제다. 그만큼 해고자와 무급휴직자의 복직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유일 사장, 와락에 가 보라”

요즘 쌍용차 공장 안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달 말 무급휴직자 400여명은 금속노조를 탈퇴한 기업별노조인 쌍용차노조를 상대로 수원지법 평택지원에 조합원 권리확인을 위한 가처분신청을 냈다. 월급이 나오지 않으면서 조합비 자동납부가 중단돼 정권 상태가 된 조합원들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소송이다.

회사는 3년 넘게 방치했던 유급 휴직자 일부를 업무에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리해고 대상에서 빠졌던 이들은 파업 참가를 이유로 견책·경고·정직 처분을 받았다. 8·6 노사합의에 따르면 바로 업무에 복귀해야 했다. 하지만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지금까지 평균임금의 70%를 줘 가며 이들의 업무복귀를 외면했다.

그런 가운데 회사는 다음달 2일부터 유급 휴직자 76명 중 24명에게 두 달간 순화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역구 국회의원 중재 노력에도 11명의 비정규직 재고용 약속을 끝까지 모른 척하던 회사가 이례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지부장은 "오는 10월 실시되는 쌍용차노조 선거 때문 아니겠다"고 반문했다.

금속노조는 이달 20일 쌍용차에 교섭요구 공문을 보냈지만 회사는 답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26일 이채필 고용노동부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이유일 사장은 "희망텐트 같은 외부세력이 정상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쌍용차 경영진은 "죽음의 행렬이 멈출 수 있도록 사태 해결에 나서 달라"고 주문하는 쌍용차 해고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은 투쟁하지 말고 차를 팔아야 할 때”라는 엉뚱한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김 지부장은 이와 관련해 “이유일 사장이야말로 심리치료 상담센터인 와락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말했다.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김 지부장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늘구멍만큼의 빛"이라고 강조했다. 아주 작더라도 희망이 보여야 쌍용차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3년째 이어지는 짙은 암흑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그중 하나가 잠이다. "하루에 3시간 이상 못 잔다"는 그는 호주머니 속에 항상 수면제를 넣고 다닌다. 이달 초 22번째 동료가 떠난 소식을 전하던 기자회견에서 김 지부장은 "죽음보다 삶이 힘들다"고 눈물을 떨궜다.

“진짜 살고 싶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며 얼굴을 붉히던 김 지부장 역시 죽음의 충동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와락’에서 8주간 치료를 받은 뒤에야 심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고 했다.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이 악물고 일어선 쌍용차 노동자들…. 이제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