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우리 세상은 자유롭고 대등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헌법은 선언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자유권은 모든 국민에게 보장된다(제12조 내지 22조, 제37조 제1항).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서, 그 계약의 보호를 통해서 이 세상은 세워지고 존속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유가 보장된 세상, 사적 자치가 보장된 자유의 왕국이라고 우리 세상의 법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노동자는 이 자유의 왕국에서 자유를 노래하지 않는 것일까. 재산이 없으니, 이 세상의 천지창조의 날에 자본의 원시적 축적으로 생산수단에 관한 권리를 박탈당했으니 노동자는 가진 게 노동할 수 있는 몸뚱아리라서 오직 자신의 노동을 자본에 팔 자유만 자신에게 남았다고 말해왔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는 자유를 누리고,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자는 자유를 잃었다고 말해왔다. 그러니 노동운동은 ‘노동자세상은 자유의 왕국’이라고 노동자에게 약속했다. 이 세상에서 노동과 자본은 계약체결에서 법적으로 대등하다. 근로자와 사용자가 근로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서에 나란히 서명날인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동자는 불평등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자유롭고 대등한 사람과 사람의 계약은 노동과 자본의 불평등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자유로운 계약으로 노동이 자본에 복종해야 하는 자유 없는 근로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자유의 세상은 노동자에게 자유가 박탈된 근로관계를 가져왔다. 그러니 노동운동은 박탈된 자유를 되찾겠다고 자유의 왕국을 말해온 것이고, 노동조합은 자유가 박탈된 근로관계에서 불평등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겠다고 교섭하고 투쟁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자본의 질서는 계약 자유만으로 확대, 재생산돼온 것이 아니다. 근로계약관계의 형성만이 아니라 근로관계상의 책임도 살펴보아야 한다.

2. 근로관계에서 사용자가 부담하는 책임은 무엇인가. 임금·해고 등 고용·업무상 재해·근로관계상에서 발생한 손해배상 등 일체의 법적 책임에서 사용자는 어디까지 책임을 지는가. 고용상의 책임을 보자. 당연히 근로자에게 귀책사유가 있으면 징계해고를 통해 근로계약관계를 사용자는 종료시킬 수 있다(근로기준법 제23조). 그런데 근로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데도 사용자의 사정을 내세워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제24조). 근로계약관계의 일방 당사자인 사용자가 자신의 사정만을 이유로, 즉 사용자의 귀책사유인 경영사정으로 근로계약관계를 종료시키는 것임에도 법이 책임을 면책시켜 주는 제도가 정리해고제도다. 다른 민사법상 계약과는 달리 근로계약관계는 사용자에 종속돼 그 지휘명령에 따라 계약내용의 이행, 즉 근로 제공을 하게 된다. 근로자의 근로수행 자체가 사용자가 형성해 놓은 작업장질서 아래 전적으로 놓이게 된다. 어떻게 근로자를 작업에 배치하고 근로하도록 하느냐 하는 것은 사용자의 권한이다. 근로자가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사용자는 모든 조치를 다해야 한다. 근로자가 근로 제공하다가 재해를 입었다면 사용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용자에게 과실이 없으면 산재보상에 그친다. 과실이 인정돼도 근로자의 과실비율을 따져 과실상계해서 손해배상액은 크게 감액되고 만다. 산재보상은 업무상 재해로 근로자가 사망했어도 유족급여로 평균임금 1천300일분, 장의비로 120일분이 고작이다(산재보상보험법 제62조, 제71조). 근로자가 사용자를 위해서 사용자의 작업장에서 사용자가 지시하는 대로 일하다가 사망했다 해도 사용자에게 과실이 있다고 인정되지 않으면 이처럼 산재보상제도에 의해서 약 4년분 임금을 지급받으면 그만이다. 업무상 재해보상은 국가가 관리하는 보험제도를 통해서 사용자에게 책임을 제한해 주는 것으로 기능하게 된다. 본래 책임은 과실이 없으면 인정되지 않는다. 이 과실책임주의라는 근대 민법의 책임원리에 따른다면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에 관해 사용자에게 과실이 없으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게 된다. 그런데도 업무상 재해시 보상해 주는 것이니 사용자의 책임을 확대한 것이라고 말해왔다(근로기준법 제8장(재해보상)). 그래서 근로자에게는 산재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게 됐으니 근로자 보호를 위해서 진일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과실책임주의는 사용자의 작업장에서 사용자를 위해서 사용자에 종속돼서 그 지휘명령에 따라 일해야 하는 근로계약관계까지 당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사용자 자신이 근로자의 재해에 무관할 수가 없다. 일반 계약관계나 제3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손해의 책임 부담과는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과실책임주의를 근로관계에 적용시켜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건 이 근로관계상 업무상 재해시 책임귀속의 문제로 과실책임주의라는 민사책임의 원리는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고 종국에는 파탄나고 말 것이었다. 사용자가 자신을 위해 사용종속관계 아래서 근로를 시켜왔던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에 관해서는 과실이 없다 해도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과실책임주의는 법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발생한 책임을 귀속시키는 원리라고 봐야 한다. 법적으로 대등한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의 계약 체결에 의해서 형성된 근로계약관계는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관계는 우리 법원이 판례로 수도 없이 선언해 왔던 것처럼 사용종속관계, 즉 복종의 질서가 지배하는 불평등관계이다. 과실책임주의를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불평등한 복종관계인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과실책임주의를 말하지 않았다. 사용종속관계에서 제공되는 근로는 사용자의 지휘명령에 따른 것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사용자는 그 근로에서 발생한 근로자의 재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노예와는 달리 시간을 정해서 복종하는 관계라고 해서 달리 볼 수 없다. 그런데 업무상 재해에 관해 산재보상으로 책임을 제한해 버렸다. 업무상 재해로 인한 사용자의 책임은 유한한 것이라고 이 세상의 법은 선언하고 말았다.

이러한 근로관계상의 사용자의 책임조차도 자본이 부담하게 하지 않겠다고, 이 자본의 세상은 유한책임의 사용자를 만들어냈다. 유한책임을 지는 자본의 법적 분신, 회사를 만들어 냈다. 유한회사의 주인인 사원, 주식회사의 주인인 주주는 그 지분·주식을 넘어서 어떠한 책임도 부담하지 않는다. 임금·고용·업무상 재해 등 법상 사용자가 부담해야 할 책임은 이 회사가 가진 재산 등 능력범위로 제한되고 말았다. 근로자의 노동으로 이 회사가 실적을 올려 그것이 모두 이익 분배 등으로 자본의 몫으로 귀속됐다 해도, 이 회사를 껍데기만 남겼다 해도, 그리고 폐업하고 청산·파산한다고 해도, 법이 사용자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한 것조차도, 근로자는 그 책임을 그 회사를 넘어서 자본에겐 물을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임금·퇴직금이 체불됐어도, 근로자에게 손해가 발생했어도 자본은 회사가 책임질 문제이지 자신은 무관하다고 말하면 그만인 세상이다.

3. 그러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책임은 어떨까. 여기서는 유한책임이 없다. 근로계약관계에서 발생한 사용자에 대한 근로자의 책임은 면책이 없다. 사용자에게 근로계약 위반으로, 불법행위로 손해를 입혔으면 그로 인한 인정되는 손해를 근로자는 사용자에게 져야 한다. 그 책임의 범위를 제한하는 법은 없다. 불법파업으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된다면 수십억원, 수백억원이라도 근로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무한책임이 지배한다. 자본의 책임은 유한회사·주식회사라는 회사제도를 통해서 법상 인정되는 책임조차도 회사를 방패막으로 해서 유한한 것으로 제한되지만 근로자에게는 이건 허용되지 않는다. 근로자 단체가 무슨 법인격을 취득해서 근로관계상 근로자의 책임은 그 단체만 지고 근로자는 부담하지 않는다고 하는 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불법파업에 따른 근로자에게 인정되는 책임을 노동조합만이 부담하는 것이라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근로관계는 근로자가 사용자를 위해 성실하게 근로를 제공해야 함을 전제로 세워져 있는 것이고, 이것은 철저히 근로자의 무한책임을 전제로 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4. 이 세상에서 노동과 자본의 질서는 단순히 계약 자유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유한책임과 노동의 무한책임, 책임의 불평등은 이 질서의 확대·재생산을 돕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의 유한책임을 박탈함으로써 자본의 노동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노동에 대한 자유의 박탈을 막아낼 수 있는 길로 향하는 첫 걸음일 수 있다. 이 세상에선 불평등한 근로계약의 체결 제한뿐만 아니라 그 근로계약관계에서의 책임의 불평등에도 노동운동은 관심을 둬야 한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권한만이 아니라 책임도 불평등하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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