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중독자란 삶에 있어 일이 전부가 된 사람을 말한다. 일 중독자는 갈수록 더 높은 성과를 내야 희열을 느낀다. 만일 할 일이 없어지거나 자유시간이 오면 기분이 어색하거나 적응이 잘 안 된다. 불안과 자기상실감 그리고 죄의식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인다. 강수돌 교수(고려대)가 ‘일 중독에서 벗어나기(도서출판 메이데이)’라는 책에서 묘사한 일 중독자의 모습이다.

강 교수는 일 중독자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프리랜서형, 블루칼라형,햄릿형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블루칼라형은 장시간 노동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일 중독증에 빠져든 경우다. 일을 해야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경제적 강제가 일 중독을 부채질한다. 중증의 일 중독자는 만성적인 두통이나 우울증에 시달린다.

대표적인 블루칼라인 자동차 노동자들은 특근이나 잔업을 할 때 흔히 ‘한 대가리 더 한다’라는 은어를 쓴다. 그들에게 한 대가리는 위안이자 안정제다. 휴가나 휴일보다 몸이 부서지더라도 한 대가리를 더 하는 게 낫다고 느낀다. 그만큼 생계를 유지하는 게 팍팍하다는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장시간 노동을 내면화한 탓이다. 그래서 한 대가리 더 따오는 노조간부는 영웅이고, 그렇지 못한 노조간부는 활동을 안 한다고 여긴다. 일 중독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기아자동차에서 주간연속 2교대 시범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이런 관행이 나타나지 않았다. 기아차는 지난 3월26일부터 4월6일까지 소하리·화성·광주공장 등에서 주간연속 2교대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당초 기아차는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7시30분(2시간 잔업), 오후 8시30분부터 다음날 새벽 7시30분(2시간 잔업)까지 주야 맞교대로 공장을 가동했다. 주간조와 야간조가 10시간씩 근무한다는 의미에서 ‘10-10’이라고 한다. 이런 작업시간은 주간조의 경우 오전 7시20분부터 오후 4시, 야간조의 경우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30분까지로 변경됐다. 심야근무를 없애는 대신 주간조와 야간조의 작업시간은 ‘8-9’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적어도 이 기간 동안 기아차 노동자들에게 일은 삶의 전부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랬다. 필자는 시범사업이 진행됐던 지난달 30일 기아차 광주공장을 방문했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광주분회 한 관계자는 “조합원들은 이대로 쭉 갔으면 좋겠다는 반응”이라면서 “조합원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라 놀랐다”고 전했다.

노조간부가 들려 준 한 조합원의 얘기는 이런 반응을 체감케 했다. 김아무개 조합원은 입사 7년차다. 시범사업이 시행된 후 야간조였던 김아무개 조합원은 새벽 1시30분에 작업을 마치고 난 후 회사에서 제공한 통근차량을 타고 집에 돌아왔다. 김아무개 조합원은 오랜 만에 깊은 잠을 잤다. 과거에는 밤샘근무 후 오전에 집에 와 자면 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는데 시범사업 후에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난 김아무개 조합원은 아내와 단둘이 극장 나들이를 했다. 그가 아내와 극장에 간 것은 입사 7년 만에 처음이었다. 아내가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되레 미안했다는 것이다. 김아무개 조합원은 “시범사업이 시범으로 끝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반응은 시범사업이 벌어지고 있는 기아차 전 공장에서 고루 나타나고 있다. 대낮에 퇴근하는 주간조 조합원은 오랜 만에 가족들과 함께하는 넉넉한 시간을 가졌다. 김아무개 조합원처럼 새벽에 퇴근하는 야간조 조합원도 아침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갑작스럽게 찾아 온 여유시간에 어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는 게 노조간부들의 전언이다. 물론 통근차량이 원활하지 않았거나 장거리 거주자에 관한 대책이 미흡했던 점, 주차장이 협소하거나 식사시간에 붐볐던 점은 개선할 사항으로 지적됐다.

이렇듯 적어도 시범사업 기간 동안 기아차 노동자는 한 대가리를 요구하는 일 중독자가 아니었다. 밤샘근무라는 쇠사슬에서 풀려나니 가족과 함께하고 자신의 내면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간연속 2교대 시범사업은 두 주간만 진행된다. 본격적인 시행은 노사 간 협상에 달려 있지만 기약할 수 없다. 시범사업에 앞서 금속노조 기아차지부는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임금보전을 요구했지만 회사측의 반대로 관철되지 않았다. 기아차지부는 추후 임금·단체협약 갱신협상에서 수당을 인상해 보전하겠다는 계획이다. 기아차지부는 현대차지부와의 공동투쟁을 통해 주간연속 2교대제를 연내에 시행한다는 복안이지만 시행시기와 방법을 두고 현대차그룹측과 의견이 엇갈린다.

이는 주간연속 2교대제의 본격적인 시행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 근무형태에 관한 기아차 노동자들의 열망을 꺾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밤샘근무에서 해방되는 일상의 큰 변화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노사는 이런 조합원들의 바람에 부응해야 한다. 조합원들이 체험한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소박한 열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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