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4·11 선거전의 뜨거운 열기 속에 많은 민생 쟁점들이 떠올랐다. 노동시간 단축문제도 그 하나다. 그런데 갈수록 시들해지는 듯하다. 여러 노동공약이 난무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은 그다지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한동안 노동시간을 줄이라고 재촉해 대던 고용노동부장관도 요즘은 조용하다. 이명박 정권의 민간인 사찰문제로 선거판이 가열되면서 더욱 그렇다. 사용자 쪽은 어떻게든 이 난국을 피하고자 이런저런 궁리에 바쁘면서도 ‘선거통에 적당히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아 보인다.

노동시간은 노동문제의 원천이고 그의 단축은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노동절(메이데이)은 세계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을 향한 피땀 어린 염원의 기념탑이다.

우리나라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는 매우 짧다. 일제 식민지시대 참혹했던 장시간·저임금 노동은 53년 근로기준법 제정에 따라 최초로 1일 8시간, 주 48시간으로 제약됐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혀 무시된 채 36년을 유지해 왔다. 그 사이 노동시간은 단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연장될 위기를 맞기도 한다. 60년대 후반부터 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사용자단체들은 각종 휴가의 폐지와 함께 노동시간의 연장을 획책했다. 70년대에는 수출증대를 이유로 노동시간 연장이 공공연하게 추진됐다.

이후 노동시간 단축은 전국 전 산업을 뒤흔든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2년 지난 89년에 이뤄진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은 1일 8시간, 주 44시간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97년에는 ‘주 44시간, 1일 8시간’ 규정과 함께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도입됐다. 2004년부터는 사업규모에 따라 연차적으로 2011년까지 주40시간제가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일부 연구자들의 지적대로 매우 빠른 시간에 이뤄진 변화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노동자들의 큰 양보와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한 근로시간 연장, 26개 업종에 대한 연장근로시간 제한의 적용제외에다 노동의 유연화 전략에 따른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도입, 여성의 유급생리휴가·월차유급휴가·연차유급휴가 등의 폐지가 첨가된 것이다.

20세기 말 주 35시간대에 들어선 유럽 나라들에 비하면 한참 멀었지만 이제 우리는 법률상 주 40시간, 주 5일제 근무가 일반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산재수준과 함께 세계최장의 연간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규모 나라의 ‘국격’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다. 이렇게 법률 규정과 실제 연간 노동시간이 다른 주요 요인은 다름 아닌 연장근로와 연장근로 제한 예외업종의 장시간 노동으로 지적된다.

하지만 장시간 노동의 폐해를 극복하는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적은 없었다. 노동운동 쪽에서도 여러 가지 개선요구의 하나로 제시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98년 이후 현대자동차에서 주간 연속 2교대제를 둘러싸고 공방이 되풀이돼 오다가 지난해 사내하청업체인 유성기업에서 파업이 벌어져 갈등이 빚어졌다. 그리고 올해 들어 고용노동부장관이 자동차회사들의 장시간노동 개선을 요구하면서 관심이 집중됐다.

사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창출 효과는 노동조합 쪽에서 누누이 제기해 왔다. 최근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현행 근로기준법이 정한 연장근로 포함 주 52시간만을 지키더라도 45만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노동계는 소득보전을 전제로 일단 환영했고 사용자는 비용증가와 시기상조론을 들어 강경한 반대다. 이유야 어떻든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 노사정 간의 입장들이 바뀐 듯하다. 노정이 한 줄에 서서 사용자와 대립하는 매우 희귀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휴일근로를 연장근로로 보는 경우 소득보전을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연장근로수당이 소득의 큰 비중을 차지해 왔던 것은 탈법적 노무관행을 묵인해 온 정책의 결합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랫동안 노동시간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 오지 않은 노동운동의 방심 탓도 있다. 하지만 노사 간 힘의 불균형 관계가 현저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행정해석의 전환, 근로감독의 확대 강화, 관계법령 개정 등 제도적 조건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임금보전·임금체계의 문제도 그 속에서 해결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은 노사 간 협상으로 풀어야 할 몫이다. 이미 주간연속 2교대제를 시험실시 중인 사업장 노동자들의 반응이 뜨겁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그럼에도 경제적 이해에 얽매여 주춤거리는 사이 흐지부지될 위험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 투쟁을 여하히 결합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것인지 많은 검토가 필요하겠다. 모처럼 다가온 노동시간 단축의 호기를 선거바람에 휩쓸려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leewb45@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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