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식
전국철도노조
운전국장

요즈음 기관사들은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린다. 열차를 세우려는데 서지 않는 꿈, 열차를 움직이려는데 움직이지 않는 꿈, 정지위치를 벗어나 승객들이 항의하는 꿈, 징계위원회에 출석해 질책당하는 꿈. 밤새 가위눌리고 나면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힘이 쭉 빠진다’고 한다.

최근 영등포역 KTX 열차 ‘역주행’을 시작으로 전동차 1호선 오산대역, 2호선 뚝섬역 등 열차의 종류와 노선을 가리지 않고 발생한 소위 ‘역주행’에 대한 시민과 일부 언론의 무차별한 공격이 빚어낸 현상이다. 마녀사냥 하듯 한바탕 난리법석이 지난 끝은 추풍낙엽처럼 직위해제된 기관사들의 한숨이 차지했다. 목을 빼고 대기하던 그들은 더러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더러는 다른 사무소로 전출을 갔다. 하지만 충혈된 눈으로 경위서를 쓴 뒤 동료들의 위로를 받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고기관사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역주행’ 공격으로 주눅 들어 있던 어느 날 7호선 하계역에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한 승객이 비상전화로 “왜 열차를 세우지 않고 통과하느냐”고 거칠게 항의하자 당황한 기관사가 달리던 열차를 멈춘 뒤 관제와 협의해 퇴행(뒤로 움직이는 것)했다고 한다. 열차는 분명히 정차했었음에도 강박에 의한 스트레스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유발한 것이다.

사실 전동차가 정지위치를 벗어나 앞뒤로 조금씩 이동하는 일은 수시로 벌어진다. 아무리 유능한 기관사라도 내구연한이 다된 차량을 비롯한 다양한 차종과 운전방식·선로조건·승객수·날씨 등에 따라 달라지는 전동차의 제동력을 자유자재로 제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수도권에서는 하루에 수십만 번, 1년이면 수천만 번의 홈 정차가 이뤄진다. 그것도 대부분 수동운전이어서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한편 기관사들은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뒤 정지위치 맞추기가 더욱 까다로워졌다”고 한다.

1호선을 운행하는 김아무개 기관사는 “교대하러 나가서 제동이 잘 듣지 않는 구형차량이라도 걸리면 공연히 화가 난다”고 털어놓았다. “아무리 긴장해서 잘 세우려고 해도 안 되는 차량과 3시간을 넘게 정지위치를 맞추려 씨름하다 보면 등짝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는다”고 진저리를 쳤다.

4호선 최아무개 기관사는 사상사고를 겪지 않았음에도 요즘 들어 부쩍 “지하구간에 들어가기가 두렵다”고 호소한다. “몸이 뻣뻣해지고 머리가 쭈뼛 솟는다”는 것이다. “불안해서 어떻게 운전했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고 말한다.

얼마 전 공황장애를 앓던 도시철도 기관사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18분간 열차가 지연돼 ‘출근길 시민이 큰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큰 불편을 겪었다’고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던 그 시간, 그 18분이라는 시간 동안 뒤따라온 열차 기관사는 온몸이 찢겨진 동료기관사의 시신을 한 점 한 점 수습했다.

전동차 기관사들은 ‘역주행’이 아니라도 충분히 힘들다. 사상사고를 경험한 뒤 심신이 쇠약해져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사람들도 있다. 개인평가에 불이익이 될까 봐 연가·병가조차 내지 못할 만큼 구조조정이나 퇴출 프로그램은 이미 기관사들의 마음 한켠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다.

레일 위에서 역주행은 없다. 왔던 선로로 되돌아가는 퇴행이라는 개념이 있을 뿐이다. 전동차가 다니는 선로는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각종 신호보안장치에 의해 조각조각 나뉘어 있다. 각각의 선로조각은 중앙통제시스템에 의해 모든 열차의 진출입이 총괄 제어되고 있다. 따라서 뒤로 간다고 해도 앞으로 진행하는 것과 똑같이 안전한 조건을 만든 뒤 움직이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역주행의 실체는 순간적인 실수로 정지위치를 지나쳐 관제의 승인에 의해 안전하게 다시 뒤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뒤가 보이지 않아 차장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려운 운전이지만 승객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당연한 어려움이다.

승객과 언론의 빗발치는 ‘역주행’ 공격은 관리자들의 닦달과 아울러 운전규정을 더욱 엄격하게 바꾸는 부작용마저 초래했다. 전동차 뒷부분이 홈을 벗어난 경우는 아예 뒤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금만 뒤로 이동하면 해당 역에서 승하차 하려는 승객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음에도 다음역으로 가도록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운전상황을 총괄하는 관제에서 약간의 퇴행(뒤로 이동하는 것)도 승인하지 않고 있다. 워낙 퇴행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좋지 않아 자신들에게 돌아올지 모를 공격이 두려워서다.

만약 당신이 타고 있는 전동차가 정차할 때 승차위치를 맞추지 못했더라도 당황할 필요가 없다. 기관사를 믿고 조금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리면 가장 안전한 전동차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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