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금융노조 산하 주요 시중은행 노조들이 금융지주·은행에서 사외이사를 추천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KB국민은행지부가 지난 2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사외이사 추천을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이어 신한은행지부가 신한금융지주에 소속된 계열사 노조들과 뜻을 모아 사외이사를 추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은행지부·하나은행지부도 사외이사 추천의사를 나타냈다. 국내 금융산업의 중심축인 ‘빅4’ 시중은행 노조들이 모두 사외이사 추천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하나의 큰 흐름이 만들어진 셈이다.

‘감시와 견제’ 한다더니…

사외이사 제도는 경영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외부인’을 이사로 선임하고 경영을 감시하도록 한 제도다. 취지는 훌륭했지만 실제 사외이사들이 감시자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이 공시한 KB금융·신한금융·우리금융·하나금융 등 4대 금융그룹 사외이사들의 활동내역을 분석한 결과를 살펴보면 사외이사들은 경영진이 제기한 안건을 단 한 건도 부결하지 않았다.

신한은행지부 관계자는 “사외이사 선임을 견제할 장치가 없는 데다 지연·학연·낙하산 인사가 만연한 상황”이라며 “이렇게 뽑힌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이 내놓은 의견을 거스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노동계 역시 허울뿐인 사외이사 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해 왔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선 조직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주요 시중은행 노조들이 일제히 사외이사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금융권 전문가들은 “금융종사자로서의 특성과 현재 상황을 반영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사외이사를 추천하고 선임하려면 회사 내 주식지분 확보나 주주총회와 관련한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 금융노동자들은 일반노동자에 비해 이 방면에 밝다. 게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금융기관의 투기적 경영행위가 문제로 지적되면서 경영진을 감시할 사외이사를 제대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외이사를 추천하려는 금융권 노동자에 대한 여론도 유리하게 형성됐다.

높은 노조 조직률도 밑바탕이 됐다. 조혜경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은행권 노조들은 조직률이 높기 때문에 경영진과 협력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대다수 은행의 소유구조가 지주사 체제로 전환된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지주사 회장들의 황제경영과 무소불위의 권한 행사가 은행장과 노조 모두를 무력화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며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라도 경영을 감시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고 이에 시중은행 노조들이 사외이사 추천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사측 방해·준비 미흡으로 올해 사외이사 추천 실패

올해 정기주주총회를 앞두고 사외이사 추천의사를 강하게 밝힌 곳은 KB국민은행지부와 우리은행지부였다. KB국민은행지부는 KB국민카드노조와 우리사주조합 보유주식(0.91%)의 의결권을 위임받는 작업을 진행했다. 사외이사 추천·선임 과정에 필요한 지분(의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사측의 방해가 뒤따랐다. 지주사는 노조의 주주명부열람 요청을 거부해 시간을 지연시켰다. 은행은 주주제안서가 접수되자 조직적으로 위임장 철회작업을 펼쳤다. 노조는 한때 전체 주식의 0.36%에 해당하는 의결권을 확보했지만 사측의 방해로 주주들이 잇따라 위임을 철회하면서 주주제안 행사 요건(0.25%)에 해당하는 지분을 모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사외이사를 추천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은행지부는 지난 2월 내부통신망을 통해 "사외이사를 추천하겠다"고 밝혔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임혁 지부 위원장은 “노조가 자사주를 매입하는 방안을 검토했는데, 조합비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우리사주조합이 없어 직원들이 보유한 주식을 파악하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지부와 하나은행지부는 사외이사 추천에 관한 원칙적인 입장을 밝힌 상태다.

노조의 사외이사 추천, 내년에는 가능할 듯

올해 시중은행 노조들이 사외이사와 관련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전망은 어둡지 않다. 우선 노조가 우리사주조합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금융권에서 우리사주조합은 대부분 지주사 영향력 아래 있다. KB금융지주는 2010년 무기명 선거로 선출하는 우리사주조합장을 사측이 임의로 지정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우리사주조합 운영시스템을 민주화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게 노조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박홍배 KB국민은행지부 경영정책본부실장은 “기금 출연·메일 발송 등 우리사주조합의 공식적인 시스템을 통해 진행하면 사외이사 추천을 위한 주주제안이 보다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한금융의 경우 신한은행지부를 포함한 지주사 소속 노조들의 우리사주조합 지분율이 3.58%로 다른 시중은행 노조에 비해 높은 편이다. 지부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사주조합 5명의 이사 중 2명을 노조 추천 인물로 선임할 예정이다. 김형곤 지부 부위원장은 “신한 계열사들은 노사합의로 경영성과급을 주식으로 지급하는 경우가 많아 지분율이 높다”며 “우리사주조합에 대한 지부의 영향력을 높여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시중은행 노조들의 공동행동 움직임도 주목된다. 박병권 지주사은행노조협의회 의장은 “주요 4개 은행 지부 위원장들이 매달 기금을 출연해 사외이사 배출을 위한 공동컨설팅을 진행하기로 합의한 상태”라고 전했다.

상급단체인 금융노조의 지원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노조는 올해 은행연합회에 제출한 임단협 요구안에서 "사외이사와 감사위원 선임시 노동조합이 추천하는 자를 포함시킨다"(7조1항)는 조항을 신설하자고 요구했다. 유주선 노조 부위원장은 “올해 임단협이 시작되면 해당 은행 위원장들을 중심으로 대책회의를 구성하고 사용자단체와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자 인터뷰] “주총 투쟁은 장기전 … 노조 간 공조해야”

민경윤
현대증권노조 위원장

현대증권노조(위원장 민경윤)는 금융권 노조 가운데 최초이자 유일하게 노조 추천 사외이사를 배출한 역사를 갖고 있다. 노조는 지난 2004년 하승수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사측은 거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노조와 함께했던 우리사주조합이 회사 전체 지분의 15%를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경윤(43·사진) 위원장은 2일 “노조의 사외이사 추천은 노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투명한 경영을 위한 사회적 투쟁이라는 점에서 무척 소중하다”고 말했다. 현대증권은 2002년 해외자본에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 노조는 이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투쟁을 고심한 끝에 소액주주운동본부를 구성했다. 이후 조합원과 직원들이 하나로 뭉쳐 회사를 지켰다. 이때의 경험이 경영참가에 대한 자신감을 키웠다. 노조는 우리사주조합 지분율을 매년 높였고, 3년 후 사외이사 추천을 할 당시 15%를 확보했다.

민 위원장은 “지분 확보와 사외이사 추천은 긴 시간을 갖고 차분히 추진해야 하는 장기전”이라며 “한 번 실패했다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조합원들의 흔들림 없는 뚝심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파업보다 힘든 것이 주식 투쟁”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민 위원장은 “평상시에 정신적인 단결력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사외이사 추천에 대해 비슷한 의식을 가진 노조끼리 연대하고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현대증권노조는 메리츠증권노조와 공조해 각각 상대 회사의 주식을 매입해 의결권을 공유하고 있다.

민 위원장은 “평소 뜻을 같이하는 노조가 우리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주주제안이나 의결권이 필요한 순간 힘을 받을 수 있다”며 “전국의 노조가 그물망처럼 주식을 통해 얽혀 있다면 주총에서 노조의 힘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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