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오빠가 법전을 손에 쥔 채 목숨을 던진 70년 11월13일, 그해 그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오빠의 죽음은 그의 삶을 온통 흔들었다. 봉제공장에서 ‘시다’로 일하며 노조운동을 했다. 창신동에서 탁아소와 시다들의 공동체를 운영했다. 40년을 풍찬노숙했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와 함께였다.

서른다섯이던 89년 무작정 영국으로 떠났다.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주위의 도움으로 60만원을 모았다. 비행기는 왕복이 아닌 편도로 끊었다. 그렇게 11년을 머물렀다. 가정부일도 했다. 11년 만에 워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그해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됐다.
 
그는 돌아와 다시 창신동에 정착했다. ‘시다’ 생활을 하다 사장이 신분을 알아채는 바람에 쫓겨났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에 와 달라는 부탁을 뿌리치고,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자리도 거절했다. 대학교수직도 박차고 나왔다. 대신 창신동에 남아 참여성노동복지터를 만들고 직업훈련장을 세웠다.
 
다시 10여년이 흘렀다. 그의 나이 쉰여덟, 이제 국회의원이 된다. 제1 야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배정받았다. 왜 그는 야당의 비례대표직을 수락했을까. 사실 그의 삶은 끊임없이 질문을 유발하게 한다. 이를테면 참여정부에서는 왜 관료가 되기를 거부했을까. 그전에 한창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벌이던 시절에 그는 왜 영국으로 떠났을까. <매일노동뉴스>가 최근 창신동 ‘수다공방’에서 전순옥 박사를 만나 이유를 들어봤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말은 이거다.
 
“오빠나 어머니나 가장 약한 이들 편에서 정말 안타까워하면서 온 몸을 바쳐서 살아오셨잖아요. 오빠는 할 수 있었던 그때의 일, 어머니는 40년 동안 하실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일, 소명이 새롭게 주어진 것 아니겠어요. 소명을 잘 받아들이고 열심히 소명을 다하는 게 제가 할 일입니다.”
 
- 89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왜 유학을 생각했나.
“88년 11월에 일본의 한 노조 초청으로 일본에 갔다. 한 달 동안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대중집회를 다녔다. 하루에 보통 두세 번씩 미팅을 했다. 그때 40대 노동자 한 분을 만났다. 한국 노동자가 오면 꼭 고백할 게 있다고, 용서를 빌 게 있다고 그러더라. 이 사람은 60년대에 전자회사에 다니다 20대에 실직했다. 다니던 전자회사들이 싼 노동시장을 찾아서 한국으로 갔다는 거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해고됐는데, 한국노동자들은 남의 직업을 빼앗는 사람들이라고 미워했다고 했다. 그런데 해고당한 뒤 노동운동을 하고, 복직투쟁을 하면서 한국노동자들이 내 직업을 빼앗은 게 아니구나 하고 알게 됐다고, 그래서 고백한다는 얘기를 했다. 89년 4월에는 독일금속노조(IG메탈) 초청으로 두 달 동안 독일에 머물렀는데, 거기서도 똑같은 얘기를 들었다. 60년대에 직장을 잃었는데, 다니던 회사가 한국에 갔다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선배들하고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다국적기업은 싼 노동시장으로 나가게 돼 있는데 우리끼리만 싸워서는 일본·독일 노동자처럼 당하기만 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들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서 세계 노동운동을 보면서 중장기적인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다른 나라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풀뿌리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어를 못하니까 대화가 안 됐다. 우선 영어를 배워야겠다 싶어서 영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
“실제로 돈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 문제의식 얘기했는데. 선배들이 조금씩 모아 비행기표를 사 줬다. 편도밖에 못샀다. 영국서 6개월 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생활할 수 있는 돈 60만원을 모았다. 영국에 가서는 수녀님에게서 가톨릭 NGO 단체를 소개받아 일하고, 집안 청소하는 일도 하고, 그러면서 언어를 배웠다.”
 
전순옥 박사는 런던에서 3년을 지내고 노동운동사와 정치학으로 유명한 옥스퍼드의 러스킨(Ruskin) 칼리지에서 2년을 공부한 뒤 95년 워릭대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2001년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으로 같은해 워릭대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됐다.
 
- 워릭대 박사학위 논문이 유명하다.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라는 책으로도 출판됐다. 어떤 측면에서 평가를 받았다고 보나.
“70년대 박정희의 경제성장 5개년계획 정책 안에 노동자들을 어떻게 통제했는지 시스템을 봤다. 사회학 논문은 가설을 세우고 입증하기 위해 통계를 사용하는데, 다 무시했다. 통계를 믿지 않는다. 가설을 세우면 가설에 맞게 입증하려고 통계도 내 맘대로 갖다 적용해서 쓰게 된다고 지도교수를 설득했다. 수식 하나 없이 스토리텔링으로 썼고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사람들, 원풍이나 동일방직에서 일했던 사람들 150명 정도를 인터뷰했다. 논문은 8만자 내외로 작성해야 하는데 12만자를 썼다. 지도교수가 고생했다.”
 
- 남편이 영국인이다. 어떻게 만났고, 결혼은 언제 했나.
“2001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 사람이 청혼을 했다. 2002년 10월에 결혼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함께 산다. 옥스퍼드에서 만났다. 사실 외국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돌아오면서 프로젝트를 하나 갖고 들어왔다. 백색전자 생산공장의 신경영전략하에서 노사관계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보는 거였다. 6개월 넘게 창원에 있었다. 끝나고 나서 10월 초에 영국에 (논문을) 발표하러 갔다가 한국에 돌아오는 1주일 정도 남은 사이에 영국에서 결혼했다.”
 
전 박사는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두 명에게서 의견을 구한다고 했다. 한 명은 고 이소선 어머니, 또 다른 한 명은 남편인 크리스토퍼 조엘(Christopher Joel)씨다. 조엘씨는 조종사 출신 집안의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이다. 전 박사는 “너무너무 보수적인 집안의 사람이고, 영국 보수당을 대대로 찍는 집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와는 대화를 하지 못했지만 생각은 똑같았다”고 했다. 그동안 전 박사에게 들어왔던 수많은 정치권의 콜을 단념시킨 이도 남편이라고 한다.
 
- 참여정부 때도 비서관 제안을 받았는데. 왜 거절했나.
"참여정부 때 청와대 노동비서관 제안을 받았고, 인권위 상임위원도 민주당 몫으로 제안이 왔다. 2006년이니까 처음 수다공방 교육을 시작한 해였다. 인권위는 가고 싶긴 했다. 남편한테 의논을 했더니 ‘그 일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지금 시작한 게 중요한 것 같다. 노동자들 기술을 업그레이드시켜 삶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니까’라고 반대했다. 비서관 자리는 남편이 딱 잘라서 가지 마라고 했다. ‘당신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게 좋겠다. 자유롭게 있을 때 정말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어떤 얘기를 했을 때 진실로 들리고, 만약 정부의 녹을 먹으면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해도 진실로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귀국해서 성공회대에서 1년 있었는데, 나올 때 ‘교수와이프보다 노동자들과 함께 사는 와이프가 훨씬 자랑스럽다’고 박수를 쳐 줬다."
 
- 청와대 비서관을 거절했는데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를 수락한 이유는.
“이번(비례대표)에도 의논을 했다. (남편은) ‘어머니 돌아가신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어머님이 계셨으면 어떻게 말씀을 했겠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노동비서관을 제안받았을 때 ‘지금 네가 들어가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느냐, 그럼 해라. 그런데 노무현 정부 밑에서 정책적으로 다 짜여 있어서 계획대로 할 텐데. 네가 그걸 실행하는 사람이 될 거라면 가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 어머니가 계신다면 이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 같다. 남편이 최근 영국에서 돌아왔는데, 어머니하고 나하고 동생하고 찍은 작은 사진을 크게 확대해 왔다. 좋아하는 사진이라 고맙다고 했더니 ‘책상 앞에 놓고 어머니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고. 어머니가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와 남편은 항상 잘 통했다. 서로 대화는 못했지만 어머니한테 물어보고 남편한테 의견을 따로 묻는데, 결론이 항상 똑같았다.”
 
- 비례대표 후보 1번이다. 당의 얼굴이다. 어떻게 평가하나.
“민주통합당 비례대표에는 훌륭하신 분들이 많다. 내가 1번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들었다. 어깨가 너무 많이 무겁다. 책임이 막중한 자리다. 민주통합당이 나를 1번으로 선택한 것은 서민대중을 위해서 99%의 애환, 어려움을 대변하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가장 밑바닥의, 가장 열악한 노동자 출신이다. 그런 출신을 선택한 것은 민주당이 의지를 보여 준 것 아닌가. 책임이 더 무겁다는 생각을 한다.”
 
-새누리당에서도 비례대표를 제안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뭐라고 거절했나.
“새누리당에서 먼저 (제안이) 왔다. 정식으로. 그쪽에서도 점잖게 제안했고 나도 예의를 다해서 거절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봐 들어오기 어렵냐'고 묻길래 주변의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전순옥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겠다고 하니까 막을 수 없어 예의를 차린 것일 뿐이다. 사실 새누리당의 비례대표는 말이 안 된다.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제안하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 영국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봉제공장에 취직했는데.
“창원에 가기 전 일이다. (2001년) 4월에 와서 5월에 취직했다. 98년 말부터 99년 초까지 5개월 연구(논문 관련 인터뷰)를 하면서 너무 궁금했다. 세상은 너무 많이 달라졌는데 인터뷰를 하면 평화시장에서, 원풍에서 일했던 150명이 지금도 똑같이 살고 있는 거다. 사회는 잘사는 것처럼 보이고, 많이 변했는데 이 사람들은 저임금에 15~16시간 일한다. 왜 이 사람들은 열악하게 사나, 또 노동현장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너무 궁금해서 공장을 먼저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창신동에서 일했다. 공간은 달랐지만 옛날 내가 다니던 평화시장 환경과 비교해 달라진 게 없었다. 2001년과 71년을 비교해서 봤다. 71년에는 2천~2천500원 받았는데 2001년에 70만원을 받았다. 액수는 다르지만 그 돈으로 물건을 사려고 생각하면 실상은 더 어려워진 것이다. 71년에 다락방에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면 지금 공장은 지하에 많다. 노동시간도 똑같고, 다른 게 없는 거다. 그래서 비교해 보느라고 공장을 다니다가 해고를 당했다.”
 
- 공장에서 옛날 솜씨가 나오던가.
“옛날에도 미싱사까지는 하지 못했다. 당시 시다만 했다. 이번에도 시다를 하면서 ‘오바로크’ 치는 일만 했다. 거기서 나한테 학력을 물어본 것도 아니고, 나이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이름도 안 물어봤다. 언제 일했는지, 몇 년 했는지만 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름을 안 부른다. 어느날 사장이 신문을 들고 왔다. 사진이 났더라. 몰래 옆으로 오라고 하더니 펼쳐 보이면서 여기서 일할 분 같지 않으니까 당장 그만두시는 게 어떠냐고 해서 그만뒀다.”
 
- 2012년 창신동은 어떤가. 참여성노동복지터를 세운 것은 공동체를 생각한 것인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래서 봉제마을 같은 것을 생각했다. 2001년 인터뷰를 하면서 조사했을 때 아주머니들이 기술이 있어 감사하다고 했다. 어디 가서 일할 데가 없다. 기술이 있어서 고맙다고 나도 안 쳐다보고 얘기하면서 미싱을 했다. 처음에는 대답도 잘 안 하던 분들이 계속 가서 얘기하고 점심도 얻어먹고, 누구라고 얘기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졌다. 거기를 근거지로 소개하고 또 소개받아서 조사를 했다. 나중에는 아주머니들이 다 따르겠다고 하면서 고충을 말하더라. 14시간씩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노동시간이 줄었으면 좋겠다, 공장환경이 좋았으면 좋겠다 등의 하소연을 했다. 지속가능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다공방을 만들게 됐다. 기술을 업그레이드시키려고 기술교육을 시작했다. 2010년에 들어오면서 참여성노동복지터 안에 참 신나는 봉제지원센터를 만들었다. 발족식에서 실리콘밸리처럼 봉제타운을 만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 조직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한 듯하다. 생각해 둔 창신동 모델이 따로 있나.
“마을을 모델로 하는 사례를 찾지 못했다. 창신동은 세계적으로 봐도 봉제인프라가 잘 깔려 있다. 미국이나 유럽보다 낫다. 유통과 생산과 원자재를 다 취급한다. 빨리 개선을 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곳 봉제업 종사자가 20만~30만명인데, 노동시간을 줄이면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긴다. 흔히들 3D직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내가 3D를 3L로 바꿨다. 러닝(Learning), 리버레이팅(Liberating), 그리고 라이프 체인징(Life changing)이다. 배우고, 해방되고, 삶을 바꾼다는 뜻이다. 삶의 매개체로 노동이 즐거워지고 노동자가 노동의 주인이  되면 노동해방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전태일 열사의 꿈이기도 하겠다.
“그렇다. 어떻게 하다가 맥을 잡은 것 같다. 전태일의 삶을 살기 위해 살았다기보다 그게 나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전태일 평전을 다시 보니까 그 안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었다. 고기 파는 아저씨가 전태일 평전을 읽고 있더라. 평전 사이에 종이가 있길래 우연히 들춰 보니까 ‘우리 문제는 희망함이 적은 데 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게 맞는 것 같다. 사람들의 희망이 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을 가지기 위해 새로운 것을 꿈꿨으면 좋겠다.”
 
- 이제 정치인이다. 어떤 정치를 하고 싶나.
“정치인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하고 있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람들 옆에서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것, 보고 느끼고 뭘 하겠다고 하기에는 너무 힘이 미약하구나는 것을 느꼈다. 이 사회의 담이 높고 두껍다는 것을 절감했다. 국회라는 큰 기구를 통해 경험한 것들을 법·제도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원했다기보다 필요에 의해 해야 하지 않겠나. 최근 모란공원에 갔다 왔다. 오빠나 어머니는 가장 약한 약자들 편에서 정말 안타까워하면서 온 몸을 바쳐 살아오셨다. 오빠는 할 수 있었던 그때의 일, 어머니는 40년 동안 하실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소명이 새롭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명을 잘 받아들이고 열심히 소명을 다하는 게 내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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