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지난 3월23일 결국 통합진보당 대표 이정희는 후보등록하지 않았다. 민주통합당과의 후보단일화 경선과정에서 당원에게 보내진 문자메시지가 이정희를 울렸다. 이정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진보의 도덕성을 말했다. 문제의 문자메시지가 폭로된 뒤 재경선이냐 후보사퇴냐로 시끄러웠다. 진보는 도덕성이 생명이라고 야권연대를 살려야 한다고 시민사회의 원로들은 기자회견을 하고 이정희대표를 압박했다. 통합진보당 당원을 비롯한 이 나라 진보진영은 이 문제로 논란을 벌였다. 그러나 이정희가 말한 “진보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뜨”렸다는 행위, 경선과정의 투표 조작 위한 문자메시지 발송은 민주주의의 문제다. 민주통합당과의 후보단일화경선의 규칙 아래서 작동되어야 할 민주주의를 고장낸 것이 문제였다. 진보의 도덕성이라고 한다면 민주통합당은 이걸 문제 삼아 야권단일 후보사퇴를 종용할 일도 아니었다. 인민의 진보를 향한 길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세워질 수밖에 없다.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는 걸 피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과정이 진보의 길이다. 그러니 노동자의 진보의 길을 가는 노동운동은 자신에게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의 극복을 통해서 전진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가 발생한 걸 두려워해서는 안되고 그걸 숨겨서는 안된다. 그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고 해결해야 한다. 담당자의 실수니 과욕이니 뭐니 하며 별것 아닌 일로, 담당자의 도덕성, 인격, 품격 등의 일로 취급하거나 혹은 이를 덮으려는 행위야 말로 노동자의 진보를 추구하는 노동운동이 경계해야할 일이다. 노동운동에서 민주주의 문제도 그렇다. 낮은 수준에서 사소한 것이라도 민주주의가 침해되는 일이 발생했을 때는 그것을 숨기지 말고 들추어내서 해결해야 한다. 단결이니 통합이니 뭐니로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운동이므로 그것을 공개적으로 진행해서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것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 문제 극복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민주주의를 배울 수 없었다.

2. 민주주의는 계급이 없다. 부르주아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라며 우리는 민주주의에 계급이 있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인민이 행사하는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는 계급이 없다. 고대 노예제에서 노예는 주인에게 복종했다. 그곳에는 노예는 시민권이 없었다. 그런데 노예가 시민권을 갖고서 주인과 동등하게 민주주의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영역에서는 더 이상 그는 노예가 아니다. 주인은 주인일 수가 없다. 노예의 수나 재산의 크기가 아닌 1인 1표의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은 더 이상 노예제 세상이 아니다. 비록 주인의 영토가 아닌 국가권력의 장에서만 민주주의가 작동한다고 경계를 정해놓았다 해도 그 국가권력의 장에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그리고 인민의 다수인 노예는 그 국가권력을 통해서 주인의 영토를 침범해서 그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노예제에서 민주주의는 아무리 해도 노예를 제외한 자들의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는 아무리 민주주의로 다양한 실험을 했어도 노예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못했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불온한 것이다. 기존의 권력자, 지배자를 더 이상 권력자, 지배자일 수 없게 하는 반역의 붉은 주의가 민주주의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계급이 없다.

3. 노동운동은 오랜 기간 동안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폐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자본의 지배를 전면적으로 폐지했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서 노동자는 이 세상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의 소유권을 박탈했다. 농장과 공장은 공동소유가 됐다. 해당 농장의 농민, 해당 공장의 노동자가 그 농장과 공장을 공동소유하고, 나아가 농장별, 공장별 차이를 극복한다면서 전 인민적 소유라며 국유화했다. 그리고서 농장과 공장의 생산은 생산의 무질서성과 차이 극복을 위해서 전체적으로 계획되고 통제되었다. 생산방법과 생산(조직)체계, 분배방법과 분배체계는 국가의 계획과 통제 아래 있었다. 이때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본의 소유권을 폐지하고서 공동소유라고 전 인민적 소유라고 선언하는 것은 간단했다. 국가가 농지와 공장의 등기부에 그렇게 기재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소유권으로는 행사할 수가 없다. 생산의 방법과 생산(조직)체계, 분배방법과 분배체계는 당과 국가기관에 의해서 해당 노동자와 인민이 아닌, 위로부터 계획돼서 지시되고 통제되는 체제인 경우, 그래서 그 범위 내에서만 해당 농장과 공장의 노동자와 인민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체제인 경우 민주주의가 그야말로 노동자와 인민의 자기 지배로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세상에서 노동자와 인민은 지배의 대상일 뿐이다. 국가를 지배하는 당이, 결국 그 당을 지배하는 자가 그 세상의 지배자인 것이다. 지배한다는 주요한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자, 그가 지배자다. 이렇게 민주주의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아무리 노동자세상이라고 떠들어대도 노동자의 세상일 수 없다. 노동자세상은 등기부상 소유권기재란인 갑구에 등재된 것으로 끝이 나고 말 것이다.

노동운동은 자본의 전면적 폐지가 아닌 부분적인 폐지 내지 개혁도 시도했었다. 1918년 독일혁명을 통해서 독일 노동운동은 바이마르공화국을 세웠다. 당시 자본의 전면적 폐지의 길로 가고자 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스파르타쿠스반란을 진압하고서 등장했다. 에베르트의 공화국은 자본의 지배를 수정하고서 노자공존의 세상을 세우고자 했다. 그 뒤 많은 나라에서 바이마르공화국헌법을 쫓았다. 그 당시 세상은 자본주의의 수정은 불가피하다고 가르쳤다. 지금 이 나라에서 진보의 당들이 말하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복지의 수준을 넘어선 자본의 지배에 관한 폭넓은 수정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자본의 지배를 폐지하지 않았다. 그저 노자공존의 세상을 유지하는데 자족하고서 작동됐다. 정치와 경제는 엄격히 분리돼서 노동자지배의 정치는 자본지배의 경제를 함부로 침범할 수 없도록 했다.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원리라고 노동자에게 가르쳤다. 국유화된 주요산업은 국가가 임명한 관료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민주주의가 작동되지 않았다. 그러니 국유화된 사업체는 노동자와 인민의 것일 수 없었다. 노동자는 모든 사업장에서 자본의 지배에 복종하면서 단지 자신에게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정치의 일에서 투표권, 선거권을 행사했다. 민주주의가 노동자와 인민에겐 자신의 노동과 삶에서 별개 아닌 국가의 일을 정할 때, 특히 누가 된다고 자신의 노동과 삶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의원 등 대표자를 선출할 때 행사하는 귀찮은 일로 전락했다. 그러니 자꾸만 정치는 노동자와 인민에게서 멀어져 갔고 정치의 일은 정당을 지배하는 소수의 손아귀에 놓여지게 됐다. 과두제가 민주주의를 몰아냈다. 현대의 정당이 아무리 진보의 당이라고 해도 많아야 몇 십명, 몇 백명의 인사가 당의 주요 정책과 운영을 결정하게 됐다. 이제 노동자와 인민은 그 과두제에 동원될 뿐이다.

4. 그러니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노동자세상은 노동자세상이 아니다. 아무리 자본의 지배를 폐지하고서 노동자 위해 세워졌다 해도 그건 노동자세상이 아니다. 그건 노동자를 위한다는 권력자의 세상이다. 노동자는 기껏해야 위대한 위원장에 대한 충성스런 인민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자가 충성으로 그의 지시에 복종한다면 노동자와 그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다. 민주주의 앞에서는 노동자는 위원장과 동등해야 한다.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수많은 노동자조직을 만들어왔다. 대표적인 노동자조직은 노동조합과 노동자정당이다. 사업장에서 노동자권리를 쟁취해야 하는 노동조합은 노동자 조합원이 스스로 그 조직의 운영과 활동을 결정하고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철저히 민주주의를 설계해서 작동시켜야 한다. 그곳에서 노동자는 민주주의를 훈련받고 결국 노동자가 꿈꾸는 세상의 민주주의는 거기서 체득한 민주주의로 세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조합에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향한 실험을 끊임없이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훼손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노동자정당도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당을 표방하는 정당이라면 민주주의가 작동하도록 끊임없이 설계하고 작동시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거기서 아무리 낮은 수준의 것이라도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자는 누구라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 지배, 즉 인민이 주인되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침해는 인민의 자기 지배를 침해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라도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은 인민을 피지배자로, 복종의 대상으로 가는 길로 이르게 한다. 민주주의가 침해당하는 순간부터 인민은 더 이상 주인일 수 없고 노예가 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단지 생산수단의 소유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통해서 작동한다. 누가 주인이고 노예인지 우리는 민주주의 앞에서 물어야 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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