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정남 기자

13년 이상 같은 곳에서 일을 하던 남자 4명이 뭉쳤다. 원래 친했던 사이였으니 뭉쳤다는 표현보다는 어느 순간 "한번 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행동 매뉴얼을 만들어 주위의 눈을 속이며 작당모의를 한 지 3년 만인 지난해 7월 삼성에버랜드에 '삼성노동조합' 깃발을 세웠다. 언론에선 난리가 났고 무노조를 표방하던 삼성도 그룹 지주회사에 설립된 노조가 못마땅해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조를 설립한 지 8개월이 지났다. 언론의 관심은 한풀 꺾였지만 에버랜드에서는 사육사 고 김주경씨의 죽음을 두고 산업재해 은폐 의혹이 일었고, 삼성전자 백혈병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무노조 경영, 초일류 기업 삼성을 둘러싼 이 같은 회오리의 중심에서 삼성노조는 분투를 하며 진지를 지키고 있다.

"노동조합을 준비하던 시절부터 희생을 각오했어요. 돌이켜 보니 삼성이 생각보다 별 것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너무 대단한 각오를 했었던 것도 같고."

박원우(41·사진) 삼성노조 위원장은 "노조설립 당시 가시밭길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지난 8개월은 희망과 즐거움이 쌓여 가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삼성이 수십여 년 동안 무노조 경영을 해 왔고 사원들도 이런 분위기에 아주 익숙해져 있죠. 하지만 삼성이란 소통 불능의 구조 속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이 시스템에 질리게 돼 있습니다."

노조 출범 때부터 장기전을 각오한 탓일까. 사측의 은밀한 방해로 사원들과 노조의 접촉이 원활하지 않은 현 상태에도 박 위원장은 여유로웠다. 혹자들은 삼성에서 노조활동을 하는 박 위원장과 조합원들에 대해 '잘 버티고 있네'라는 시선을 보내지만 이들은 오히려 "삼성이 잘 버티고 있다"고 자신했다. 다른 삼성 사업장의 경우 노조설립 움직임만 보여도 즉각 와해가 됐는데, 삼성노조는 출범 8개월이 지났다. 삼성이 겉으론 철옹성의 모습이지만 금방 허물어질 것 같은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것이 박 위원장의 판단이다.

미약한 기운이긴 하지만 희망적인 모습도 감지되고 있다. 에버랜드는 최근 2년 임기의 노사협의회 노사위원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했다. 사업부서에서 위원 선거에 나가기 위해서는 사원 10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박원우 위원장과 백승진 사무국장은 서명을 확보해 이 선거에 나갈 수 있었다. 신원이 사측에 노출되는 서명인지라 예전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을 노조가 해낸 것이다. 조합원 4인방은 "사측은 입후보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라며 통쾌해했다.

당선이 목표는 아니었다. 노조와 사원들 간의 접촉이 사실상 차단된 상태이지만 노사위원 선거는 사측도 어찌할 수 없는 소통채널 공간이 됐다. 2명의 조합원이 선거에 뛰어든 것은 "한 명이라도 많은 사원들과 접촉해서 이야기를 나눠 보자"는 의도 때문이었다. 끝내 당선이 되진 못했지만 사원들을 만나고 퇴근한 박 위원장의 얼굴엔 자신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야기 주제가 사육사 고 김주경씨로 옮겨 가자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삼성에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불문율처럼 돼 있습니다. 상식적인 회사라면 회사가 잘못했는지, 아니면 유가족이 오해한 것인지 토론이 오갈 것도 같은데 김주경씨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회자되지 않고 있어요."

박 위원장과 조합원들이 에버랜드에 노조를 만들 결심을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자기의 의사표현이나 권리를 입도 뻥긋 못하게 하는 곳이 삼성입니다. 노조가 사원들과 사측 간 의사소통 채널이 될 겁니다. 불통의 삼성그룹에 민주노조를 뿌리내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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