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은 정치의 시간이다. 정치와 경제를 나누고서, 정치가 국가권력자의 일이 된 세상에서 지금은 정치의 시간이다. 이 나라 노동운동도 정치로 질주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민주통합당과 함께, 민주노총은 진보통합당과 정책협약을 체결하고서 달려가고 있다. 이 나라 노동운동의 시계는 2012년 4월의 총선과 12월의 대선으로 돌고 있다. 오늘도 노동자는 분명히 사용자에 복종하면서 어제와 다름없이 일하고 있는데 이 세상은 정치의 시간이다. 어디 이 나라뿐이겠는가. 이 세상의 시간은 온통 정치의 시간이다.

2. 언제부터였을까.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될 때부터 정치는 있었다. 인간의 역사는 정치의 역사였다. 그것이 신화이든 실화이든 인간은 정치를 기록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정치의 시간이었던 것이. 그때는 정치가 경제고 경제가 정치였던 시간이었다. 권력자가 주인인 세상이었다. 그러니 노예든 백성이든 반란은 주인에 대한 것이었고 그건 동시에 권력자에 대한 것이었다. 반란의 순간 피지배자는 복종을 멈췄다. 아니 복종을 멈추는 것이야말로 그 시대의 반란이었다. 대지를 일구는 노동을 떠난 세상은 존재할 수 없었다. 노예로서의 노동을 거부하자 스파르타쿠스는 로마를 향해서 진군했다. 노비로서의 노동을 거부하고자 했던 만적은 반란을 모의하면서 고려 무신권력자의 목을 베고 스스로 왕후장상이 돼야 한다고 했다. 봉건의 하늘을 낫으로 베겠다고 붉게 적셨던 수많은 농민의 반란은 지주를 베고서 봉건권력자를 향해서 진군했다. 도대체 경제를 떠난 정치의 시간은 존재할 수 없었다.

3.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이 세상에 정치의 시간이 나타난 것이. 정치가 경제로부터 분리되고 나서다. 그때 정치권력은 경제권력으로부터 분리됐다. 아니 경제를 의도적으로 정치의 일이 아니라고 분리시켰다. 근대 부르조아시민계급은 작업장에서 행사하는 자신의 전제적 지배권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 정경분리를 근대법의 기본질서로 새겨 넣었다. 근대 헌법의 기본원리와 기본질서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국민의 기본권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였다. 그렇게 감히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자유권목록이 세상에 나타났고 그 누구는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이었다. 민법의 기본원칙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자본의 지배를 침해하는 것은 불법과 권리침해로 민사책임을, 범죄로 형사책임을 져야 했다. 이때부터 정치는 경제와 분리됐다. 정치와 경제는 지배자가 다르고 그 작동원리를 달리했다.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경제의 지배자 자본가에게 복종해서 일하며 살아간다. 노동자의 노동과 삶은 사업장의 장소적 표현, 작업장의 지배자 자본가에 철저히 종속됐다. 그러니 노동자의 삶은 작업장을 떠나서는 개선될 수가 없다. 노동자에게 가장 기본적인 생존수단은 임금이다. 임금은 자본가의 소유권으로 귀속된 것, 그래서 자본의 전속적 지배권을 갖는 것에서 지급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로서 분배받는 것이 아니다. 아니라고 이 세상의 법질서는 새겨 넣었다. 그러니 자신의 노동 결과물에서 임금을 임의적으로 떼어낸다면 노동자는 절도죄로 처벌받고 만다. 노동자는 임금을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휴식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본가의 법적 분신, ‘사용자’의 지시에 복종해서 사용자를 위해서 노동한다고 봐야 한다. 연봉 7천만원의 현대자동차 노동자라도 노동자는 그래야만 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정치는 노동을 배신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노동과 삶을 떠나서 세워진 정치가 노동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동과 삶의 개선은 고작해야 사용자에 복종하면서 발생하는 불평불만, 부당함과 불합리함을 해소하기 위한 것들이다. 세금을 걷어서 복지라는 이름으로 열악한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 것들이다. 그 동안 이 세상에서 정치는 의료·교육·주택 등 갖가지 영역에서 이런 것들을 만들어 왔다. 정치가 경제로부터 분리된 근대의 시간에서 정치는 언제나 노동을 배신하고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제 정치가 경제로부터 분리됐다고 지금 우리는 정치의 시간이다. 경제로부터 분리됐으니 절대다수인 노동하는 인민이 선거권을 행사하는데도 이 세상은 안전했다. 노동의 지배자인 경제권력 자본은 경제로부터 정치를 분리하면서 노동하는 자가 개입할 수 없는, 선거권으로 선출되지 않는 사업장에서의 신성불가침의 권력자가 됐다. 그리고서 이 세상은 지금 정치의 시간이다.

4. 통합진보당은 지난 2월 19대 총선공약 중 첫 번째로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5대 노동공약’을 발표했다. “1. 2017년까지 노조 조직률 20%, 단체협상 적용률 50% 확대, 2. 비정규직 대책, 3. 최저임금 현실화, 4. 실노동시간 단축, 5. 노동법원 설치”를 발표했다. 지난 주말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은 야권연대의 공동정책합의로 노동분야에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금지, 기간제의 사용사유 제한과 간접고용 규제, 불법파견 금지” 등과 산업별 단체교섭 법제화 등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 정상화를 위한 노동관계법 개정에 합의했다. 이것이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이 온통 총선과 대선으로 달려가고 있는 정치의 시간표다. 뭐 다른 진보의 당이라고 얼마나 다르겠는가. 이것들은 사업장에서 사용자가 노동자를 복종시키는 지배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그 지배권의 행사에서 발생하고 있는 부당함을 개선하고자 하는 정치권력자의 일목록이다.

뭐 이럴까. 자본의 전횡이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노동을 위한 자본의 자체의 개혁은 권력자가 되겠다는 진보의 당도 민주의 당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적어도 노동자를 대변하겠다는 당의 후보가 이 나라 권력자가 되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노동을 위해서 자본의 전제와 전횡의 질서를 재편해보겠다고 공약일망정 걸고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가. 민주든 진보든 뭐가 됐든 노동을 졸로 보는 자본의 질서를 용납할 수 없다고, 그래서 그것을 어쩌겠다 하는 이런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뭐 이럴까. 노동자를 위한다고 좋은 일자리 만들겠다, 정규직되도록 하겠다…. 뭐 이런 것이 우리의 노동정책일까. 노동의 진보라면서. 노동자가 자본의 노예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 자신의 노동정책이라고 당당하게 자랑하고 있다. 그러니 노동자는 그거면 행복할 거라고 투표로서 지지해줘야 할까. 뭐 노동자를 위한다면 어디 귀퉁이서라도 낮은 목소리라도 우리는 노동자를 자본의 전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 당장은 아니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꿈꾸는 세상이다, 뭐 이래야 하지 않나. 그래야 당장은 아니라도 노동자가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는 자신의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노총·민주노총 등 노동운동은 이 나라에서 이번 총선과 대선이 노동과 진보에 새로운 전망을 열 중대한 시기라고 했다. 그래서 노동자의 시간과 욕망을 온통 권력자를 뽑기 위한 투표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아무개는 우리편이라며 당선시켜야 한다고, 그 누구가 우리 편인지를 정하기 위해서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그렇게 그것이 현시기 노동운동의 절대절명의 과제라고 몰아왔다. 그러고서 지금 정치의 시간이다.

5. 지금은 분명히 정치의 시간이다. 사업장에서 사용자에 복종해서 일하는 노동자라도 지금 이 나라에선 총선과 대선으로 달려가고 있다. 사용자에 복종해서 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운명을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정치의 시간이다. 언제 이런 인간의 시간이 있었던가. 지금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어느 시간보다도 더 노동하는 인민이 권력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 즉 직접·비밀·평등과 보통의 선거권을 행사하게 됐다. 하지만 유권자로서 노동자는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 없이 이 나라 노동운동이 투표하라 하는 대로 투표해야 한다. 사용자의 부당한 지배를 시정하겠다 하는 호소에 투표장에 불려나가야 한다. 그래서 그거라도 희망이라고 투표해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서 정치의 시간은 노동을 배신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노동운동은 그것이 노동의 정치라고 노동자를 선거로 투표장에 몰아넣고 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정치의 시간이 노동에 희망일 수 있으려면 자본의 노동에 대한 부당한 지배가 아니라, 자본의 노동에 대한 지배가 부당하다고 총선과 대선이라는 정치시간표에서 이것을 개선하거나 시정하기 위한 공약들을 내놓아야 한다. 비정규직·차별 금지·최저임금·노동시간 단축·산별교섭법제화 이런 것들만으론 이 세상에서 노동자에게 정치가 희망일 수 없다. 신성불가침으로 분리해 놓은 경제에 파고들지 못하는 정치의 시간은 노동자가 꿈을 포기하고 복종의 질서가 더욱 정교하게 체계화되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노동운동은 노동자에게 희망이라고 말한다. 이런 인간의 시간이 있었던가. 세상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정치의 시간에 노동하는 인민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던가. 이런 시간이라면 지금은 노동을 배신하는 정치의 시간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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