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공장 없이 운영되는 제조업체가 존재할까. 생산설비는 있는데 정규직 생산직원은 0명인 공장이 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상은 가능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아니다. 전 세계 스마트폰 판매량 1위인 ‘애플’을 떠올리면 된다. 애플은 한국·중국·대만·싱가포르·독일로부터 부품을 공급받는다. 이 부품들은 중국·브라질·아제르바이잔·핀란드·독일에서 조립·생산된다. 이렇듯 애플은 굴뚝 공장 없이도 스마트폰 제조업체로서 전 세계를 주름잡는다. 애플과 같은 사례는 세계 전자업계의 트렌드가 됐다. 그렇다면 한국의 전자업계는 어떨까.

최근 국내 최대 불법 파견업체가 적발되면서 전자업계의 이러한 실태가 드러났다. 수원지검 평택지청은 지난달 27일 경기·충청 일대에서 31개의 무허가 파견업체를 운영한 CS그룹 서아무개 회장을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위반 등으로 구속 기소했다. 파견법에 따르면 제조업체 직접 생산공정에는 파견근로가 금지돼 있는데 CS그룹은 이를 악용했다. CS사는 사용사업주와 짜고 ‘도급계약서’를 작성해 사내하청으로 위장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파견 후 2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는 사용사업주가 직접 고용해야 하는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서다.

CS그룹은 이런 방법으로 지난 2005년 이후 2천90개 업체에 노동자를 불법 파견했다. 지난달 27일 현재 213개 업체에 1천230명의 파견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평택·천안 등 3곳에 휴대전화 제조공장이 있는 중견업체인 ㄱ사의 사례다. 이 회사는 일반 관리직을 제외한 3개 공장 생산직 노동자 885명 전원이 파견 노동자다. CS그룹 등과 같은 무허가 파견업체와 도급계약으로 체결한 뒤 사내하청으로 위장했으니 ㄱ사는 사실상 불법파견 사업장이다. 공장과 생산설비는 있다곤 하나 애플과 같은 트렌드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전자산업은 기술개발 속도가 빠르고 제품의 수명이 짧아 경기변동이 심한 업종이다. 때문에 전자업계는 위기 비용을 전가하고 생산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내하청 등의 외주화를 추진했다.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의 전자업체 가운데 생산공장이 있는 곳은 34%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거나 사내하청으로 운영되는 전자업체가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CS그룹과 휴대폰 제조업체 ㄱ사와 같이 당국의 감독을 피해 불법 파견으로 공장이 운영되고 있는 점이다. 휴대폰 제조업체 ㄱ사 사례는 전자업계에선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사내하청으로 전환하려는 전자업체 중에서는 기존 정규직 생산직 전원을 정리해고해 노사갈등이 장기화되고 있는 곳도 있다. 노동계는 이런 사례로 시그네틱스를 꼽고 있다. 재계 순위 42위인 영풍그룹의 반도체 후가공업체인 시그네틱스는 노조가 사내하청의 일종인 소사장제를 거부하자, 지난해 7월 정규직 노동자 28명 전원을 정리해고했다.

지난해 6월 말까지 고용노동부에 신고된 파견사업체는 1천708곳, 파견노동자는 9만2천371명이다. 이 가운데 3개월 미만자 37%를 포함해 6개월 미만 초단기 파견노동자 비중은 57%에 달한다. 이를 고려하면 수도권의 중소·영세 전자업체는 초단기 파견근로이거나 불법 파견을 활용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반면 중견 또는 대규모 전자업체는 실제로는 파견계약이면서 도급계약으로 위장한 사내하청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CS그룹과 중견 휴대폰 제조업체 ㄱ사의 사례를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때문에 노동계에선 불법 파견노동자 규모를 약 47만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당국에 보고된 파견 노동자 규모보다 5배 이상 많다.

사내하청으로 가동되는 공장은 전자업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자업계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맞다. 그렇다면 CS그룹이 6년 동안 국내 최대 규모의 불법 파견업체로 군림하는 동안 관계당국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러니 CS그룹 같은 불법 파견업체를 따라하려는 유사업체마저 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검찰과 법원 그리고 노동부는 그간 불법 파견업체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해 왔던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파견업체와 사용사업주가 짜고 도급계약으로 위장하면 속수무책인 만큼 사내하청과 파견업체에 관한 면밀한 실태조사도 서둘러야 한다. 특히 공장 없는, 정규직 생산직원이 한 명도 없는 전자업체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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