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날 회사 정문 앞에서 노조원들과 용역경비들이 맞붙었다. 파업투쟁하다 복귀한 그는 구사대로 쇠파이프를 든 용역들 뒤에 서 있었다. 그 뒤 자살을 시도했고 지금 정신과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 회사의 또 다른 노동자는 형과 함께 10년 넘게 다니고 있다. 그 노동자보다 먼저 복귀한 형은 어느날 그를 부르더니 회사가 구조조정 등 어떻게 할지 모른다며 사측과 가까운 새로 설립된 기업별노조로 넘어오라 했다. 그 뒤 형제는 눈에 띄게 서먹서먹해졌다. 두 가지 모두 지난해 야간노동 철폐투쟁이 격렬했던 유성기업 사례라고 지난주 한 언론에 보도됐다. 그는 나서기 싫어도 구사대로 동료와 적이 돼야 했고, 그의 형은 그와 갈라져서 사측 노조에 가입해야 했다. 이렇게 세상은 벽이다. 싫어도 서 있어야 하고, 원하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고 가입한다. 그러니 세상은 노동자가 넘기 어려운 벽이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은 노동자를 딛고 서 있는 것이겠다. 구사대가 아니라도 어용노조가 없어도 노동자는 싫어도 공장과 회사에 가야 하고, 그는 원하지 않아도 사용자에 복종해서 노동해야 한다. 노동자의 목에 개고리를 걸어 공장과 회사의 기둥에 묶어 둬서가 아니다. 노동자는 스스로 공장과 회사의 담장 안으로 날마다 걸어 들어간다. 코에 코뚜레해서 작업장의 기둥에 묶어둬서도 아니다. 노동자는 스스로 작업장과 사무실에서 자동기계가 돼서 작동하고 있다. 결코 사슬과 채찍에 의해 강제되는 노동이 아니다. 노동자는 스스로 한다.

2. 왜 이럴까. 뭐 인권의 역사니 역사의 발전이니 뭐니 하지 마라. 자유를 위한 투쟁이 역사발전을 이뤄 낸 것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랬다면 원하지 않는데 구사대로 불려나가고 형과 동생으로 노동자가 갈리는 일이 이 나라에서 지금 일어날 수 있겠는가. 자본에 날마다 노동이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계속될 수가 있겠는가. 시민혁명으로 성취한 근대의 자유를 말하지 마라. 그건 저 18세기, 19세기의 혁명의 역사에서나 떠들 수 있는 말이다. 자본의 세상, 물건에 대한 소유의 크기가 세상의 지배력의 크기가 된 자본의 세상에서 진정한 근대의 자유는 이미 자본의 자유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러니 당신 지금 자코뱅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건 헌법교과서의 착오가 분명하다. 그래도 당신이 인간의 역사가 인권의 역사이고 역사의 발전이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다. 당신이 말하는 인권은 노동자를 뺀 누군가의 인권이고 당신은 그 자의 역사를 짖어 대고 있다. 분명 시민혁명은 대다수 인민에게 근대의 자유를 선물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부르주아의 자유를 위한 것일지라도 부르주아 상공인인 시민계급뿐만 아니라 인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에게도 자유라는 선물을 선사했다. 대표 없는 징세, 인신과 재산에 관한 각종 봉건적 권력규제로부터의 해방의 목록에 시민계급은 자유의 이름을 갖다 붙였다. 농민도 공납 부담이 면제됐다. 시민계급의 동맹자로서 농민은 농지를 경자유전의 원칙으로 분배받았다. 시민계급이 그 대상이 본래 봉건권력이었던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이고자 했던 그것이 근대의 자유목록이 됐다. 그리고 그것이 부르주아민주주의로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노동운동은 인민의 자유라고 노동의 자유의 첫 단계이자 전제라고 정식화했다. 근대의 자유는 봉건적 권력과 소유로부터의 해방목록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부르주아인 상공인, 자영농민에게는 분명 자유를 줬다. 그러나 여전히 시민계급에 복종해야 했던 노동자의 자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계약자유의 이름으로 노동자의 자유는 억압됐다. 주종법으로 근로계약위반죄로 처벌됐고, 르 샤플리에법 등으로 단결이 금지됐다. 시민혁명으로 쟁취한 근대의 법은 노동자를 공장과 회사에 몰아넣었고 사용자에 복종하도록 했다. 결국 노동자의 자유는 근대의 자유로서 보장된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에 의해서 근대의 자유와 맞서 싸우면서 확보돼 왔다. 근대의 자유는 노동의 자유의 첫 단계도 전제도 아니었고 노동의 자유와 대립해 서 있는 자유였다. 노동운동은 그것을 투쟁을 통해 노동자가 확인해 온 역사였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민주주의를 말한다면, 근대의 자유목록을 가지고 정권교체를 말한다면 그것이 노동자의 자유인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지금까지 정식은 근대의 자유 위에서 노동의 자유가 설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의 자유는 노동자의 자유를 딛고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내세우는 민주쟁취가, 정권교체가 노동자의 자유를 딛고 서는 것이 아닌지 우리를 의심해야 한다.

3. 그러니 다시 묻는다. 지금 이 세상에선 왜 강제 노동이 아닐까. 이 세상의 물질을 차지하고 있는 자본의 힘은 국가권력을 가지고 강제 노동의 법칙을 세상의 질서로 만들 수가 있었다. 사실 시민혁명으로 근대의 자유목록으로 자신의 자유를 확보한 시민계급의 힘은 봉건권력을 무너뜨렸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차지하진 못했다. 당시 자본이라고 해 봐야 세상의 극히 일부만 차지하고 있었다. 절대다수 인민은 농민으로 존재했다. 그래도 근대의 자유가 시민계급, 농민의 자유라면 그때 근대의 자유는 대다수 인민의 자유일 수 있었다. 그러니 나폴레옹군대는 이 자유의 이름으로 온 유럽을 휘젓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자본은 세상의 일부만 차지했다. 그 뒤 자본의 세상이 됐다. 자영농민은 이제 소수가 됐고 힘을 잃었다. 이제 세상은 자본의 운동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자본의 수는 여전히 소수이지만 세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대다수 인민은 자본에 복종해야 하는 노동자로 존재한다. 그러니 근대의 자유는 더 이상 절대다수 인민의 자유가 아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본은 자신이 가진 힘으로 얼마든지 강제 노동의 법칙을 세상의 질서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근대의 세상에서 어떤 자본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독점자본 또는 금융자본의 광포한 폭력적 국가지배체제였다는 파시즘이라도. 왜 그랬을까. 왜 자본은 굳이 자유다 해서 이 불편하고 불안한 질서를 짊어지고 가는 것일까. 자본은 자신의 재생산, 확대재생산에 모든 걸 바친다. 그건 자본의 생존이니까. 자신의 재력, 즉 재산의 힘과 기타 실력, 즉 그가 가지고 있는 그 밖의 힘을 총동원해서 상품을 생산·판매한다. 결국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상품 생산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 그런 노동자의 자유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 아닐까. 개고리와 코뚜레로는, 노동자의 자발적인 노동의 수행에 의하지 않고서는 자본은 재생산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의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을 산출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국가로부터 자유를 존재의 근거로 해서 탄생한 자본은 시장을 통해서만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다.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의 생산은 판매될 만한 상품의 생산은 자발적인 노동에 의해서만 산출될 수 있었던 것이고 이것이 봉건제의 생산과 소유를 물리치고서 자본제의 생산과 소유를 세상의 질서로 확보해 낸 자본의 힘이었다. 그러니 노동자의 자발적인 노동의 수행이 없다면 결국 지금 이 세상도 재생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본은 노동자를 구슬려서 스스로 공장과 회사의 담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하는 게 '불편'해도, 노동자들이 쑥덕거리며 요구하고 주장하면서 대드는 게 '불안'해도 자신을 부정해서 자본을 폐지하는 건 아니니 이런 체제를 끌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에겐 차선이 아닌 최선의 질서다. 근대의 자유를 위해서 인민이 쟁취한 자유 때문에 자본이 차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당신이 말한다면, 그러니 차선의 자유를 위해서 우리는 투쟁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냐고 묻겠다. 그리고 당신이 노동자라면 노동자를 위하는 자라면 의심하라 말해 주겠다. 근대의 자유를 의심하라. 차선의 자유를 의심하라. 그저 그건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유일한 질서일 뿐이다. 노동자를 복종하게 하는 자유다.

4. 자본에겐 그 질서는 너무도 쉽다. 의식주를 자본이 지급하는 임금에 전적으로 의존시키기만 하면 아무리 불평불만의 노동자라도, 노동해방을 입에 달고 사는 자라도 작업장에 들어와 노동을 수행하게 된다. 일단 자본의 운동법칙이 지배하게 되면 그 세계에선 누구든 자본에 복종해서만 생존할 수 있으니 너무도 쉽다. 개와 소는 주인이 밥그릇을 쥐고 있다고 해서 도망치지 않는단 보장이 없다. 그래서 개와 소는 개고리와 코뚜레를 해 둬야 안심이 된다. 노동자는 그걸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장과 회사에 와서 노동을 한다. 그러니 지금 세상은 노동자에겐 거대한 벽이다. 노동자는 어째야 할까. 밥그룻 함께 쥐자고 하든가, 더 나간다면 그 밥그룻 내거라 하고 네 밥그룻은 네 스스로 챙기라고 하든가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저 밥그릇은 주인에게 맡겨 두고서 밥을 좀 더 달라고 한다면 스스로 복종하는 자유가 노동자의 자유인 거라고 황당한 말들을 하게 된다. 지금 세상은 노동의 자유를 말하지 않고서 진보정책이니 복지정책이니 노동정책이니 뭐니 하며 노동자를 위한 밥그릇을 채워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밥그릇의 크기와 상관없이 밥그릇의 소유와 관계없이 노동의 자유를 말하지 않는 한 노동운동은 언제나 제자리 뛰기다. 자본이 세워 놓은 자유의 벽을 넘어야 노동의 자유가 보인다. 이미 우리의 세상에서는 근대의 자유는 대다수 인민의 자유가 아니다. 근대의 자유에 짓밟힌 노동자가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이미 근대의 자유는 낡은 자유가 됐고 인민의 자유목록은 노동의 자유로 세워질 수 있다. 이제 노동운동은 근대의 자유의 벽을 넘어야 한다. 노동자를 근대의 자유의 벽에 가둬선 안 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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