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얼마 전 술자리에서 곧 금속노조 법률원 경남사무소로 내려가실 송영섭 변호사님이 노래 한 자락을 부르셨다. 내 가슴 속에 계속 남아 있을 노래라고 운을 떼시면서 부른 노래는 “짤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으로 시작했다.

생각해 봤다. 내게는 가슴 속에 계속 남아 있을 한 가지가 있는지. 그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노수석'.

대학의 낭만을 꿈꾸며 입학한 새내기인 나는 96년 3월 대학 등록금 인하 투쟁에 참가했다. 종로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뛰어 올라갔을 때 그곳은 내가 알던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전경들은 지상으로 뛰어올라간 학생들의 양팔을 잡아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전경들을 피해 도망쳐야 했다. 비 오는 날 추적거리는 길을 뛰어 도망간 명동성당에서, 그 사람이 전경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그 사람은 내 가슴 속에 새겨졌다. 어쩌면 내가 죽었을 수도 있었는데 나 대신 죽은 사람. 그래서 3월29일은 다른 이들에게는 1년 365일 중에 어떤 하루이겠지만 나에게는 잊어서는 안 되는 날,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2012년 1월13일. 내 가슴 속에 새겨야 할 또 하루가 있었다.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이지현' 선생님.

트위터를 뒤적이다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이지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순간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를 다투고 계신 재능학습지 선생님들 중 한 분이셨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얼굴 한 번 뵙지 못 하고 먼 곳으로 보낸 선생님을 생각했다. 집으로 들어가 재능교육 부해·부노사건의 파일을 찾아보니 거기에 선생님이 이메일로 보내 주셨던 진술서와 신분증 사본이 있었다.

선생님의 진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돼 있었다.

- 재능교육 의정부지국 소속 수학·한자·국어·영어·한글·과학·중국어를 가르쳤던 선생님.

- 본인과 재능교육 회사 계약의 형식은 위탁계약이지만 그 실질에 있어 임금(수수료)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회사에게 근로를 제공했습니다. 회원관리(방문)시간은 오후 1시께부터 밤10시까지이고 오전시간에는 교재정리·교육·학부모상담·진도조정·각종 서류제출 등 회사가 지시하는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 본인은 회원의 집을 주 1회 방문해 한 과목당 15분씩 재능교육의 교재를 가지고 회원을 교육했습니다.

- 본인이 속해 있는 재능교육교사노동조합(현재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은 99년 설립 직후부터 이 사건 회사와 단체협약을 체결해 왔음.

- 학생들을 교육하는 업무로서 제3자를 고용해 업무를 대행케 할 수는 없습니다.

2011년 10월 15일 진술인 이지현.

다음날 찾아 간 의정부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이지현 선생님을 영정사진으로 처음 만났다. 유득규 학습지노조 사무처장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지현 선생님은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를 다투는 행정소송을 하시기로 결심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내게 보내 주신 진술서도 병상에서 쓰셨던 것일 게다. 동료들이 걱정할까 봐 많이 아픈 걸 숨기고 괜찮다, 괜찮다 하시며 홀로 영정사진을 촬영하러 가셨다고 한다.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12명의 해고자 선생님들은 이지현 선생님을 가슴에 묻었을 것 같다. 법규를 담당하고 있어 ‘법규야’라고 불렸던 이지현 선생님을, 나도 잊지 않겠다고, 가슴 속에 남아 있을 이름으로 기억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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