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야당 진영에서 재벌개혁에 관한 정책들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당내 경제민주화특위를 구성, 재벌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예전보다 강화된 출자총액제, 순환출자 금지제도, 중소기업 보호방안 등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통합진보당은 10대 재벌의 해체를 핵심 기조로 내걸고, 10대 재벌에 대한 맞춤형 해체전략을 제시했다. 약간의 각론과 강조점 차이가 있지만 지금까지 두 정당이 밝힌 재벌개혁 정책의 핵심은 재벌의 소유구조 개혁이다.

재벌 오너들이 소량의 지분을 가지고 그룹 전체를 지배하며, 사리사욕을 위해 기업의 부와 더 나아가 한국경제 전체를 망친 극단적 예는 98년 외환위기다. 외환위기 핵심 원인이었던 민간 부채의 대부분은 대우그룹·현대그룹·삼성그룹 오너가 해외차입을 통해 독선적으로 진행한 중복투자와 문어발식 사업확장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재벌들의 이러한 경영방식은 2006년 정몽구 회장, 2008년 이건희 회장이 회삿돈을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한 사건, 최근 최태원 SK회장과 그 동생이 2천억원 넘는 회삿돈을 자신들의 선물투자 손실분을 메우는 데 사용한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외환위기 이후에도 계속됐다. 재벌 오너들의 작태는 기업의 경영부실은 물론 한국경제에서 이들 기업들이 차지하는 절대적 지위로 인해 경제 전체에도 큰 악영향을 가져왔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마치 재벌의 소유구조 개혁이 무언가 큰 진보를 가져온다고 가정하는 것은 오류다. 미국의 예를 보자. 미국에서는 19세기 말 미국판 재벌해체법이라 할 만한 반독점법을 만든 이후 20세기 초까지 수백 개 대기업들이 해체됐다. 그리고 기존 소유주가 다수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주주자본주의의 시작이다.

이 주주자본주의는 70년대까지 정부의 강한 금융규제와 실물경제의 고성장 속에서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80년대 시장 탈규제 정책과 실물경제 저성장이 시작되며 근본적인 문제점을 만들어 냈다. 주주들의 이해는 기업의 장기적 발전이 아니라 단기적 이해에 집중됐고, 주주들의 이해에 봉사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는 경영진은 주식시장에서의 주가 부양과 투자 재원조차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고배당에 집중했다. 제조업 기업들은 비용절감을 위해 공장을 해외로 이전시켰고, 단기적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금융사업을 확장시켰다. 주주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GM과 GE는 2000년대에 금융수익이 전체 이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생산시설은 절반 이상이 해외로 이전돼 있었다. 록펠러와 같은 재벌 오너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꿰찬 것은 구조조정과 배당 전문가들이었다.

사실 20세기 초 반독점법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노동운동이었다. 미국자동차노조(UAW)는 기업의 경제적 독점력 강화가 노동의 교섭력 약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지엠·포드·크라이슬러는 2차 세계대전 전후 부품사를 비롯해 다양한 기업들을 빠른 속도로 인수합병하는 동시에 비용경쟁에서 뒤떨어지는 부분은 노조가 없는 계열사로 아웃소싱했다. 완성차 기업의 조합원들은 상대적으로 저임금 상태에 있던 합병된 기업의 노동자들이 기존 노동자들의 임금 압박 요인이 되는 것을 회피하고 싶어 했다. 동시에 자신들의 일자리가 아웃소싱으로 인해 불안에 내몰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미국자동차노조는 반독점법을 통해 자본의 이러한 행태를 규제하기를 원했고, 결과적으로 주주자본주의로 이행하는 파트너로 역할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국 노동자들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지 않았다. 미국식 재벌해체 뒤 거대기업의 소유주가 휘둘렀던 노동탄압은 주체만 달리해 더욱 강화된 형태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주주들로부터 비용절감을 통한 순익 증가를 요구받은 전문경영인은 마치 자신의 존재이유가 오직 구조조정에 있는 것처럼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비수익 사업부문을 매각했다. 노동자들은 주식시장에서 주식거래 수치를 통해서만 모습을 나타내는 실체도 알 수 없는 주주들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노동의 권리를 중심으로 경제체제를 재편할 것을 주장하고, 관철시키지 못한 미국 노동자들의 반독점 운동(우리식으로 하자면 재벌개혁운동)은 결국 자본 간의 소유·경영 관계만 변화시켰을 뿐이다. 노동이 없는 반독점운동은 결국 경제체제의 형태와 상관없이 노동에 불리했다.

현재 야당들이 내세우고 있는 재벌 소유구조 개혁도 근본적으로 미국의 주주자본주의 이행 과정과 다르지 않다. 재벌의 소유구조 개혁 이후 기업을 통제할 주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유화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이는 주주일 수밖에 없다.

한국 노동운동은 재벌개혁에 대해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금 당장 재벌의 사회화와 같은 급진적 요구를 할 수 없다면, 현실적으로는 재벌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산별교섭 제도화 같은 요구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재벌기업을 포함한 산별교섭은 노동이 산업적 차원에서 통제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겉만 요란한 재벌개혁론보다는 재벌에게 노동의제를 중심으로 개혁을 요구할 제도가 우선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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