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사(반올림)

2007년 3월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둘째 딸 유미의 억울함을 꼭 풀어주겠다던 늙은 아버지의 마음이 실로 많은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도화선이 되고 있다. 고 황유미씨가 세상을 등진지 5년 만에 첨단 생산설비·영업기밀의 베일에 가려진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의 진실이 드러나는 발표가 지난 6일 있었다.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이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간 실시해 이날 발표한 ‘반도체 제조 사업장 정밀 작업환경평가 연구’ 결과가 그것이다. 노동부는 향후 전체 반도체산업의 노동자 보건관리에 관한 발전방안을 모색해 나간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이번 산보연의 연구결과는 자동화된 최신 반도체 공정에서도 백혈병 유발인자인 벤젠·포름알데히드·전리방사선 등 1급 발암물질이 공기 중에 노출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피부암과 폐암을 유발하는 발암물질인 비소는 노출허용기준치보다 높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내용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그동안 반도체공장의 발암물질 논란은 공장에서 사용하는 물질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사용물질이 아니라 반도체 생산과정의 ‘부산물’로 벤젠·포름알데히드 등의 발암물질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삼성은 벤젠이나 포름알데히드 같은 1급 발암물질이 사용금지물질이므로 취급하지도 않아왔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2009년 서울대 산학협력단 조사결과에서 일부 감광제 성분 속에서 벤젠이 미량 검출된 결과조차도 “조사가 잘못됐을 뿐 삼성에는 벤젠이 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삼성의 자신 있는 태도는 그동안 산보연이 벌여 온 개인별 역학조사가 매우 부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고 황유미씨 등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재신청으로 실시하게 된 산보연의 개인별 역학조사는 단지 삼성이 제시한 화학물질 리스트와 (삼성이 측정해 온)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훑어보거나 매우 제한적이고 1회적 현장 작업환경 측정에 그쳤다. 따라서 뒤늦게 실시된 조사이긴 하나 이번 산보연의 조사결과는 앞으로 산재소송에서 매우 유리한 근거로 작용할 것이다.

반도체 생산과정에서 부산물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과거에 일했던 노동자뿐만 아니라 현재 일하는 노동자들도 발암물질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발암물질을 어떻게 없앨 것인지에 대해 향후 노동부에서 특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이유다. 여기에 더해 반올림뿐만 아니라 노동시민사회단체의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노출허용기준에 미치지 않는다고 안전하지는 않다. 노동부는 발암물질이 극미량 검출돼 인체에는 해가 없는 수준이라고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발암물질은 역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극미량의 노출로도 누군가는 암이 발병할 수 있다.

지난해 6월23일 삼성백혈병 1심 판결문에서도 발암물질 노출이 허용기준 미만이었지만 같은 작업환경에서 장시간 지속적으로 노출돼 백혈병이 발병됐다고 봤다. 발암물질에 대한 노출기준이란 절대 암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안전기준이 아니라 현재 국내 경제적·사회문화적 환경을 고려해서 정하고 있는 관리기준에 불과하다. 예컨대 미국은 벤젠 노출기준을 10피피엠(ppm)에서 1피피엠으로, 다시 0.1피피엠으로 낮췄고 노출허용기준을 낮추려는 노력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벤젠 노출기준은 여전히 1피피엠이다.

발암물질은 현장에서 완전하게 없애야 하는 것이지 극미량만 검출됐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사업장 보건관리 대책을 내놓겠다는 노동부의 발표는 반도체공장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웨이퍼를 가공하는 가공라인(삼성반도체의 경우 기흥공장)뿐 아니라 조립라인(삼성반도체의 경우 온양공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암물질들이 발생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반올림에 들어온 제보에 따르면 삼성반도체 기흥공장뿐 아니라 온양공장에서도 많은 백혈병·림프종 피해자들이 있어 왔다. 실제 증거가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이번 조사결과가 향후 산재소송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대한다.

반도체사업장은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환경이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공기는 10~20%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클린룸 안에 있던 공기가 재순환 된다. 따라서 특정 공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은 클린룸의 공기 재순환 시스템의 특성상 같은 건물 안의 모든 공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일부 공정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 생산노동자 전체의 문제라는 뜻이다.

노동부는 앞으로 삼성·하이닉스·페어차일드코리아 3개사에 대해 국소환기장치 보완 등 시설을 개선하고 발암물질이 발생하는 유기화합물을 다른 물질로 대체하라는 시정조치를 한다고 발표했다. 건강보호대책 마련도 시정조치 내용에 포함됐다. 진전된 조치이자,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노동부는 두 가지 큰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 하나는 무노조사업장에서는 결코 실질적인 안전관리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과거에 더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발생한 백혈병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항소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이라도 근로복지공단은 항소를 철회해 정부 대책의 진정성을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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