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은 5년 연속 우리나라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통계청의 2010년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암으로 사망한 인구는 10만명당 144.4명이다. 암 사망자는 10년 전(10만명당 23명)에 비해 무려 18.9%나 늘었다.

29일 노동계에 따르면 산업안전보건 분야에서도 암은 뜨거운 감자다. 암의 발병원인은 흡연이나 음주 같은 개인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벤젠이나 심야노동을 포함한 교대제 근무 같은 직업적인 요인까지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금속노조가 소속 사업장 91곳을 대상으로 2010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작업과정 중 사용하는 화학물질은 9천여종에 달하고, 이 가운데 870개 제품에 1~2급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었다.

이에 반해 암의 산재보상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폐암 등 6대 암으로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 중 80%는 업무와 관련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암의 산재 불승인율은 △2008년 84.4% △2009년 86.4% △2010년 82.1% △2011년 6월 현재 72.7%에 달한다. 도대체 직업성 암의 판단기준이 어떻길래 불승인율이 이렇게 높은 걸까. <매일노동뉴스>가 안전보건공단이 최근 펴낸 '2010년도 직업병진단사례집'에 수록된 사례를 통해 직업성 암 인정기준을 살펴봤다.

노출·잠복기 길어야 폐암 업무관련성 인정

74년부터 용접기술자로 일한 이아무개(62·남)씨는 82년 소구형 탄약을 생산하는 P사에 입사해 연마공·배관용접공으로 근무했다. 2009년 4월 간암수술 이후 검사 받다가 폐선암 진단을 받았다. P사 배관용접공의 주된 업무는 배관설치와 시설보수 작업이다. 이씨는 석면이 주원료인 보온재를 사용했다. 환기상태가 양호하지 않아 석면뿐만 아니라 용접 흄에도 노출됐다. 면마스크가 유일한 보호구였다. 이씨는 하루 한 갑 정도의 담배를 40년간 피웠으며 술은 체질상 맞지 않아 회식 때만 2~3잔 정도 마셨다. 암 발생 이전 특별한 병력은 없었다.

이씨의 폐암은 직업관련성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폐암의 잠복기 27년을 감안하고, 40년간 흡연력을 고려해도 10년 이상 석면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반면에 2000년 2월부터 의류유통회사에서 창고관리직으로 근무한 이아무개(사망당시 55세·남)씨의 비강종양은 업무관련성이 낮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씨는 2008년 9월까지 8년간 옷의 하차작업과 계절별 제품분류 등 전반적인 창고관리를 2개의 조립식 건물에서 수행했다. 주 6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했고, 먼지가 많아 면마스크를 쓰고 일했다. 종종 벌레나 곰팡이가 난 옷도 있었다. 그러나 창고내부에는 환기구가 없었고, 역학조사 결과 0.0045 ∼0.009피피엠 정도의 포름알데히드가 측정됐다. 이씨는 20년간 2~3일에 한 갑 정도의 흡연력이 있고 일주일 2~3회 소주 1병 정도를 마셨다. 2008년 6월께 코 막힘 증상으로 병원을 다녔다. 2008년 8월 비강종양으로 진단받은 뒤에는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이씨는 그러나 항암치료 중 암이 뇌로 전이돼 2010년 3월 사망했다. 공단은 이씨의 비강종양이 8년간 환기가 불량한 작업장에서 발생한 포름알데히드와의 관련성이 없지 않으나, 노출수준이 낮아 업무관련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인쇄·반도체제조·시험연구직 가리지 않는 백혈병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집단발병으로 논란이 된 백혈병은 다양한 사업장에서 직업성 암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변아무개(사망당시 39세·남)씨는 95년부터 원자력 발전소에서 기계운전업무를 하다 2006년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진단받았다. 2008년 4월 간부전으로 사망했는데, 작업환경 중 피폭되는 누적선량은 16.51밀리시버트로 측정됐다. 변씨의 백혈구 수치는 퇴사할 때까지 매년 방호검진 자료상에서 정상범위에 있었다. 국제적으로 방사선 피폭 허용선량은 연간 50밀리시버트다. 우리나라는 이 범위에서 5년간 100밀리시버트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변씨의 백혈병은 누적노출선량 기준치를 초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업무관련성이 낮다는 주장과 저선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경우도 백혈병이 발생하는 연구결과가 최근 보고되고 있다는 점에서 직업성 암 여부를 둘러싼 쟁점사항으로 보고됐다.

15년간 부직포 생산업체에서 실험연구직으로 근무하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을 진단받은 김아무개(41·남)씨의 경우 직업관련성이 높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김씨는 시험연구 작업 중 각종 유기용제에 노출됐다. 특히 93년부터 2000년 합성 접착제를 실험·제조하면서 벤젠과 툴루엔·스티렌 등에 노출된 사실이 인정됐다.

79년부터 30년간 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인쇄공으로 인한 유아무개(48세·남)씨도 작업공정에서 사용된 세척제에 벤젠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돼 급성백혈병과 업무관련성이 높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반도체공장에서 5년간 근무하다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2009년 11월 사망한 김아무개(사망당시 32세·여)는 직업성 암일 가능성이 낮다는 판정을 받았다.

역학조사를 실시해도 과거 근무한 작업환경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 김씨의 질병과 업무관련성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인정하기 힘들어 업무관련성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백혈병의 원인 요인에 노출된 수준이 자연상태의 노출수준으로 낮다는 이유로 직업성 암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직업성 암' 원인규명 못해 쟁점투성이

공단의 직업병진단사례집에서도 직업성 암은 상당부분 쟁점으로 남아 있다. 앞서 언급한 반도체 노동자 김씨의 백혈병처럼 발병원인의 업무관련성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선아무개(32·여)씨의 유방암도 직업관련성 여부가 쟁점이 되고 있다. 선씨는 2000년 4월 반도체업체에 입사해 전자현미경으로 와이퍼 불량검사를 하다 2005년 9월 퇴사했다. 4년 후인 2009년 11월 그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선씨가 근무할 당시 3조3교대와 4조3교대의 교대제가 시행됐고, 퇴사할 당시인 2005년에는 1월에서 9월까지 근무기간 중 25% 정도가 밤 10시부터 시작하는 심야노동이었다. 그의 가족력에 암이 없으며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안전보건공단은 "선씨가 다양한 화학물질에 노출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통상적인 수준보다 낮은 연령에서 유방암이 발병했다는 점에서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방암과 관련해 명확히 알려진 직업적 요인이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고 교대근무 기간(5년)이 짧아 업무관련성이 낮다는 주장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직업성 암 인정범위 확대될까

지난해 12월 51명의 금속노조 조합원이 직업성 암으로 공단에 산재보상을 청구했다. 금속노조는 지난해 4월과 8월에도 각각 14명·16명의 암환자에 대한 산재신청을 낸 바 있다. 이들 가운데 현재 직업성 암으로 판정받은 이는 3명이다. 8명은 불승인됐다. 나머지는 공단의 안전보건공단의 역학조사나 근로복지공단의 현장조사가 진행 중이다. 불승인된 사례는 업무와 인과관계가 적거나 직업성 노출과의 관련성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공단은 설명했다.

최근 전문가조차 입증이 어려운 직업성 암 인정기준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원인조사에 따르면 산재로 인정받은 공식 직업성 암은 △2007년 7건 △2008년 10건 △2009년 4건 △2010년 17명 등으로, 전체 암 환자의 0.1%(2007년 기준)에 불과하다. 전체 암 환자 가운데 4%를 직업성 암 환자로 추정하는 국제 의학계의 관례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낮다.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전체 암의 4% 를 직업성 암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랑스나 영국의 직업성 암 비율은 8~9%이고, 독일은 12%다.

현재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에서 규정한 직업성 암은 방사선 피폭에 의한 혈액암, 검댕·타르 등 석유화학물질에 의한 상피암, 염화비닐에 의한 폐암, 타르에 의한 폐암, 크롬에 의한 폐암, 벤젠에 의한 조혈기계암, 석면에 의한 악성중피종과 폐암 등이다. 정부는 이 가운데 5개 암의 인정기준을 현행보다 완화하고 시행령에 없는 발암물질을 새로 추가하는 방안을 노사와 함께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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