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감기처럼 오한이 나더니 참을 수 없이 뼈가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2010년 12월 충남대병원에서 백혈병 진단을 받았어요. 그 뒤 항암치료를 받고 지난해 4월 골수이식 수술을 받았죠. 하지만 어머니의 상태는 점점 위독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합병증이 와 지금은 두 눈이 실명 상태에 가깝습니다. 혼자서는 거동도 할 수 없어요. 어머니는 한국타이어 사내하청 노동자였습니다.”

백혈병과 합병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권아무개(55)씨의 딸 성지영씨의 말이다. 권씨는 지난해 6월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를 인정받고 현재 치료 중이다. 권씨는 한국타이어 금산공장에서 발견된 첫 백혈병 환자다. 79년 준공된 대전공장에서 간헐적으로 확인되던 백혈병 피해자가 96년 준공된 금산공장에서도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급 발암물질 벤젠의 평균 잠복기는 11.4년. 긴 잠복기를 거친 죽음의 공포가 노동자들을 엄습하고 있다.

전업주부로 지내 온 권씨는 96년 한국타이어 사내하청업체에 입사해 약 14년간 가류공정과 수리작업장에서 일했다. 당시 한솔이라는 유기용제에 함유된 벤젠 등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됐다. 생고무를 녹여 떼거나 붙일 때, 기계에 고무가 묻어 이를 떼어낼 때, 불량품을 수정할 때, 옷이나 피부에 고무가 붙었을 때 수시로 한솔이 사용됐다.

작업장 온도가 내려가 타이어 고무가 굳어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겨울에는 창문에 비닐을 씌웠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공장 내부는 유해가스와 분진으로 가득했다. 권씨와 함께 96년 입사한 노동자들은 “과거에는 환풍기나 마스크도 없이 일했고, 코를 풀거나 침을 뱉으면 시커먼 분진가루가 섞여 나왔다”고 증언했다.

권씨를 시작으로 한국타이어 금산공장에서 추가 발병자가 나오고 있다. 권씨의 딸 지영씨는 “어머니가 산재로 인정된 뒤 근로복지공단 대전지역본부를 찾았을 때 금산공장 내 새로운 백혈병 발병자 1명이 산재를 신청한 상태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어떤 노동자가 죽음의 대기표를 받아들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죽음의 대기표' 받아든 한국타이어 노동자

고용노동부는 2006~2007년 한국타이어 노동자 15명이 잇따라 사망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뒤 특별근로감독에 들어갔다. 2008년 5월 발표된 특별근로감독 결과 한국타이어의 법 위반 사항은 무려 1천394건에 달했다. 사법처리 554건·과태료 부과 273건·위험기계기구 사용중지 14건·시정지시 553건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

그런데 특별근로감독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산재 신청은 계속되고 있다. 특별근로감독 직후인 2008년 6월1일부터 지난해 5월1일까지 한국타이어 산재신청 현황자료에 따르면 246건의 산재신청이 제기됐고 221건의 산재승인이 이뤄졌다. 대개 끼임·감김·열상·화상 같은 사고성 재해이거나, 신체의 특정부위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제조업종의 특성이 반영된 대표적 퇴행성 질환인 근골격계질환이 산재로 인정됐다. 국내 1위 타이어업체인 한국타이어의 작업환경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한 점은 사고성 재해나 퇴행성 질환의 산재신청과 산재승인이 꾸준한 반면, 유해물질에 의한 질환의 경우 산재 신청건수도 산재 승인건수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것이다. 회사측의 산재 은폐 시도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대전공장 자재입출고팀에서 근무해 온 이아무개(43)씨는 2007년 산재신청을 냈다가 회사로부터 강제휴직을 당했다. 이씨는 2006년 ‘말초신경염 의증’ 진단을 받고 2007년 산재를 신청했다. 그러자 회사는 이씨에게 3개월의 휴직을 강요하고, 휴직기간이 만료된 뒤에는 복직을 거부했다. 이씨는 “유기용제에 의한 신경증이라는 의심이 들어 산재를 신청했다”며 “회사측은 유해물질에 의한 산재 신청 사례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복성 휴직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산재 신청했다고 강제휴직 강요 의혹

회사측의 산재 은폐 시도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은 또 있다. 2007년 노동자 집단사망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직후 회사는 고인별로 가계도를 만들어 유족에 대한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2007년 9월 만들어진 가계도에는 한국타이어 회사의 로고가 선명히 찍혀 있다. 고인의 가족관계를 파악한 뒤 회사측이 유족들과 접촉한 내역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회사는 고인별로 전담 대응자를 두고 △유족들이 재산 등을 놓고 갈등 관계에 있는지 여부 △가족 내에서 실권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가족들의 체형이 비만형인지 아닌지 △한국타이어에 근무하는 친척이 있는지 △고인의 회사 내 친분관계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회사측 사람들이 여러 차례 찾아왔어요. 와서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장 환경을 안전하게 개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돼 회사의 입장이 난처하다고도 했어요. 유족들이 합의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회사의 말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유족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유족들은 2008년 겨울 회사측과 합의서를 체결했다. 합의서에는 회사가 유족에 위로금을 지급하는 대신 유족들은 일체의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언론과의 접촉도 원천봉쇄됐다.

합의서의 위력은 대단했다. 유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송영섭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집회·시위의 자유나 언론활동을 제약한 반사회적인 내용의 합의서라고 해도, 합의체 체결 쌍방이 내용을 인지한 상태에서 서명을 했다면 합의서의 법적 효력은 유지되는 걸로 본다”며 “유족들이 합의서를 체결한 이후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한국타이어 노동자 집단사망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500억원 들여 작업환경 개선했다더니…

작업현장에 접근하기 어렵다 보니 노동계도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의 건강실태를 파악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2007년 당시 유족 자문의의 자격으로 한국타이어 역학조사에 참여한 임상혁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은 “민간인 중 유일하게 한국타이어 작업장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곳곳에 유기용제들이 방치돼 있던 모습이 생각난다”며 “노동부 특별근로감독 이후 눈에 띄는 문제점은 개선됐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이 역시 제대로 된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우려했다.

노동부의 정기점검도 형식에 그치고 있다. 노동부 대전고용노동청 관계자는 “분기별로 회사가 낸 시정계획서의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필요에 따라 현장점검을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니 회사가 500억원을 들여 작업환경을 개선했다는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산재신청을 했다가 강제로 휴직을 당한 뒤 복직한 이아무개씨는 “공장 몇 군데 동그랗고 큰 원통이 설치됐는데 유해물질을 빨아들여 배출하는 기계라고 했다”며 “그런데 기계가 설치된 뒤에도 여전히 분진이 날리고 고무냄새와 약품냄새가 가득하다”고 말했다.

백혈병에 걸린 어머니를 수발하고 있는 지영씨도 “백혈병 역학조사팀과 함께 방문한 공장은 한눈에도 뭔가 위험해 보였다”며 “회사가 많은 돈을 들여 환경을 개선했다고 들었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고, 공장에 머무르는 내내 공기가 탁해 숨이 턱턱 막혔다”고 설명했다.

반면 회사측은 2008년 노동부 특별근로감독에서 지적된 사항을 100% 시정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타이어 홍보팀 관계자는 "노동부 등의 권고사항을 100% 이행하고 있고, 노동자 건강관리는 물론 글로벌 기업의 위상에 맞는 작업환경 조성을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며 "노동부 특별근로감독 이후에는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질환에 대해 산재신청이 이뤄지고 있고, 산재 결과에 따라 민사합의 또는 소송비용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은회 기자
양우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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