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석 기자

그의 삶은 변화의 연속이었다. 개척해 온 길이었다. 이제는 숙명으로 받아들인 노동운동가의 삶이 그러했다.

증권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돌아보니 20여년을 노동운동가로 살아왔다. 95년 신한증권노조 위원장에 당선됐고, 99년 소산별노조인 증권산업노조를 만들어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2년에는 사무연맹 증권업종본부를 설립했다. 2006년 사무금융연맹 위원장에 당선된 후 재선했고, 지난해 12월 사무금융서비스노조 설립을 주도해 대산별노조의 기틀을 닦았다. 그렇게 변화를 시도했다.

이제 그의 임기는 불과 1개월여 남았다. 소회는 어떨까.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증권노조 사무실에서 정용건(49·사진) 사무금융연맹 위원장을 만났다.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20년


"정말 직업이 노동운동가가 됐네요. 아들이 '아빠는 증권회사 다니면서 왜 양복을 입지 않느냐'고 물을 때는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눈에는 노동운동가보다는 양복으로 표현되는 최고경영자나 정치인이 더 좋아 보이겠죠. 그래도 아빠 직업란에 '증권회사 차장'이 아니라 '노동운동가'라고 쓰라고 합니다."

정 위원장은 지난해 12월24일 아들 둘을 데리고 평택 쌍용차 희망텐트촌을 다녀왔다. '와락! 크리스마스' 행사가 진행되던 그날이었다. 아이들은 선뜻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수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밖에서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아이들과 대화가 참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노동이 왜 중요한지, 아빠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네요."

처음부터 노동운동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92년 지금의 기획재정부 격인 재무부에서 임금 가이드라인 5% 지침이 내려오면서 증권사 노동자들의 반발이 시작됐다. 그 후 대의원부터 시작된 노조활동은 그의 삶 전반을 바꿨다.

노조활동을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95년 신한증권노조 위원장에 당선되고 재선을 거쳐 99년 임기가 끝났다. 그는 그때 눈물을 펑펑 쏟았다. 노동을 위해 뭔가 바꾸고 싶어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쉽지 않았다. 피로감과 절망감이 함께 몰려왔다. 그럼에도 그에게 증권노조 초대위원장이라는 또 다른 직책이 맡겨졌다. 또다시 10여년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재선 위원장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그를 따랐다. 신한증권노조·증권노조·증권업종본부·사무금융연맹 위원장까지, 선출직 임원선거에서 모두 재선에 성공했다.

정 위원장은 "첫 선거는 전직 위원장에 대한 평가지만 재선은 당사자에 대한 평가"라며 "같이 활동했던 이들이나 조합원들이 저를 나쁘지 않게 평가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면에서 행운아"라고 덧붙였다.

비결이 있는 걸까. "사실 조합원들은 노조 위원장에 대해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투쟁도 열심히 하는, 전인적인 인간상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힘들 때가 참 많은데. 딴 건 모르겠고, 정말 열심히 사업장 돌아다니고 부지런했던 것만큼은 인정받을 만했던 것 같아요."

이제 무엇을, 어떻게

그는 이제 또 다른 기로에 섰다.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은 재선으로 점철됐지만 3선은 없다. 그게 그의 신념이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제 스스로 열정을 유지하기가 참 어렵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는 것같이 느껴져 우려스러운 마음도 들고…."

정 위원장은 이번 연맹 위원장 선거에 도전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 진보정당들의 모습을 보면 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이제는 정당조직과 대중조직(민주노총)이 좀 더 거리를 두고 상호 견제·협력할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계속 노동운동을 해야죠. 제가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역할이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정 위원장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오는 3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부위원장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나무가 속이 텅텅 비어 있어도 단단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중간 중간 마디가 있기 때문이죠." 그의 인생 제3라운드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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