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제약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박아무개(37)씨는 지난달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회사는 박씨에게 9개월치 월급과 2천만원 상당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박씨는 "적정인력에 대한 밑그림이 이미 그려졌기 때문에 버티더라도 소용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박씨의 사정은 부러움을 산다. 중소 제약사 영업팀장으로 일하는 서아무개(42)씨는 최악의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다. 회사가 두 달 전부터 출근시간을 앞당기고 신규 거래처를 확보하라고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씨는 “아무래도 회사가 나가라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하루하루 시한부의 심정으로 산다"고 했다.

제약 노동자, 일자리 휘청인다

제약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흔들리고 있다. 경영상의 어려움이 이유다. 엄밀히 따지자면 향후 ‘예측되는’ 경영상 어려움이다. 아직까진 영업사원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의 움직임이지만 첫 단추는 이미 꿰어졌다. 전문가들은 올해부터는 직군과 규모가 크게 확대되는 등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제약 노동계와 업계는 장기적으로 무려 2만명의 악성 실업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 종사자(약 8만1천200여명) 4명 중 1명이 실업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제약사들은 기존 직원들을 손보기(?)에 앞서 신규채용부터 줄이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국내 상위 제약사 5곳(동아·녹십자·대웅·유한·한미)의 신규채용 인원은 약 26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40% 감소했다. 동아·한미는 하반기 공채계획을 아예 접었다.

제약 노동자들은 고용위기를 몸소 겪으면서도 이미 체념한 분위기다. 서씨는 “한미FTA로 산업 생태계가 송두리째 뒤집히는 상황에서 회사 역시 우리와 같은 피해자가 아니겠느냐”고 토로했다.

국내 제약산업 '몰락 시나리오'

한미FTA가 시행되면 국내 의약품 산업이 뿌리채 흔들릴 것으로 예측된다. 특허의약품에 대한 권리가 크게 강화되면서 제약사가 설자리를 잃게 된다는 설명이다.

협정문 ‘혁신에의 접근(제5.2조)’을 통해 양국은 의약품 등재 및 보험급여 결정과 관련해 합리적이고 비차별적인 적용에 합의했다. 대다수의 기존 특허의약품의 혁신성이 인정되고 배타적 권리가 커지면서 국내 제약사에 불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국내 제약계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한미FTA로 인해 시행되는 ‘특허-허가 연계제도’다. 제약사들은 지금까지 의약품의 효과와 안정성이 인정되면 식약청의 허가를 받아 제품을 생산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시행되면 제품 허가에 앞서 그 내용이 특허권자에게 자동으로 통보된다. 복제의약품 생산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의 경우 생산이 지연될 수밖에 없고 갖가지 소송에 희말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부는 특허-허가 연계제도를 FTA 발효후 3년간 유예하기로 했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

나아가 특허권 강화가 특허 연장효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이른바 ‘에버그리닝(evergreening)’ 전략으로 원천물질의 화학구조나 적응증을 새롭게 해 특허기간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특허라는 기득권을 가진 미국 대형 제약사가 ‘꼼수’를 부릴 여지가 커졌다는 말이다. 여기에 올해 시행되는 약가 일괄인하는 '불붙은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복제약으로 연명하는 국내제약사에 한미FTA는 몰락의 시나리오”라며 “600여개에 달하는 제약사 중 70개 정도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약값 부담은 늘어만 가고…

한미FTA의 피해가 제약 노동자와 회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보험등재와 약값 결정 과정에서 미국 제약사의 개입이 허용되면서 약값 폭등이 예상된다. 양국은 향후 의약분야 정책 결정권한을 가진 위원회를 두게 된다. 이마저도 부족하다 여겨지면 ‘독립적인 검토기구(independent review body)’가 작동한다. 만약 정부가 1차로 정한 약가가 부족하다 싶으면 미국 제약사는 이 기구에 재심을 요청할 수 있다. 기존의 거부권에 더해 새로운 판정을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정부는 약가가 번복될 가능성은 희미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아무래도 재검토를 요청할 수 있는 공식창구가 생긴 만큼 정부 결정에 구속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이미 에이즈 등 희귀병 치료제를 생산하는 다국적 제약사는 공급중단을 약가 협상의 카드로 활용한다. 약값 부담이 더욱 커지리라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우석균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비준 이후 미국 제약사들이 ‘모범사례’라고 환영할 만큼 협정문의 모든 조항이 약가 상승을 예고하고 있다”며 “대다수 국내 제약사들이 미국 제약사의 하청회사로 전락하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 실장은 "‘독립적인 검토기구’에 노동계가 제외됐다"며 "한미FTA가 발효되더라도 자본의 논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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