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법률원)

2011년 1월,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에서 200여명의 교사·공무원들을 만났다. 민주노동당에 한 달에 1만원을 후원했다는 이유로 검찰이 징역형을 구형하고, 교육청이 해당 교사 전원을 해임하라고 지시한 그분들 말이다. 최후변론을 하는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20년 전 고3 때 전교조에 가입했다 해직당한 국사 선생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교사도 노동자다"라고 외치던 선생님을 응원했다는 이유로 체육관으로 불려가 볼기를 맞고 반성문을 썼던 까까머리 고3이 어느덧 39살의 아저씨가 돼 그 선생님들을 변호하는 것이 감개무량했지만 20년이 흘러도 여전히 제자리를 맴도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2011년 5월, PD수첩의 이우환·한학수 PD를 만났다. <불패신화, 삼성무노조>, <황우석 3부작> 등을 제작한 MBC의 대표적인 시사교양 전문PD들이 ‘남북 경협 중단’ 아이템을 취재하지 말라는 취재중단 지시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졸지에 드라마 세트장, 지역광고 수주국으로 전보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히 승소해서 두 분은 PD수첩으로 돌아왔지만, 공영방송이라는 MBC 내부에서도 할 말을 하지 못하는 현실이 갑갑하기만 했다.

2011년 8월, 영등포 철노회관에서 권두섭 변호사를 만났다. 권 변호사는 공공 산별노조 출범에 발맞춰 공공운수노조 법률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개소식이 열렸다. 2000년 민주노총 상근자로 왔을 때 그는 혼자였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민주노총·금속노조·공공운수노조 법률원으로 확대돼 10여명의 변호사가 그와 함께 연간 수백 건의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그가 밀알이 됐던 것이다. 어려울 때 말없이 한 발 나서고, 좋을 때 말없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그의 모습은 우리를 답답하고 힘들게 하지만 그것이 지난 10년간 또한 앞으로 민주노총 법률원을 버티게 할 원칙임을 새삼 깨닫곤 한다.

2011년 9월, 이소선 어머님이 영면하셨다. 서울대병원에서 조문할 때 슬픔과 죄송함, 그리고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어머님이 원고에 포함된 ‘청계피복 노동조합’의 국가배상 소송 중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서둘렀더라면, 조금 더 재판부를 빨리 설득했더라면 어머님 생전에 좋은 판결을 얻을 수 있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다행히 11월29일 서울중앙지법은 1970년대 청계피복노조 활동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공권력을 남용해 노조 활동을 탄압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불법구금하고, 국가가 개입해 노조를 강제로 해산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확인한 것이다. 뒤늦게나마 어머님 영정 앞에 판결문을 올릴 수 있게 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노동자가 구속·수감되는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2011년 11월, 이른 아침 서울시청 별관 앞에서 재능교육 유명자 지부장을 만났다. 구청 직원이 텐트 농성장을 강제로 철거해서 1인 시위 중이었다. 서울광장 바로 앞, 빌딩 숲 사이에 재능교육 텐트 농성장이 있다. 영하 10도를 넘는 강추위에, 새벽녘 질주하는 차량 옆 비닐로 둘러싼 텐트 안에서 이들은 농성을 하고 있다. 1천500일을 말이다. ‘우리는 노동자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 1천500일을 밤새워 농성해야만 하는 일인지 착잡하기만 하다. 재능교육 선생님들의 부당해고 소송을 진행 중인 우리들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내년에는 도로 옆 텐트가 아니라 노조 사무실에서 당당하게 활동을 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어디 그뿐인가. 올해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돌아가셨다. 쌍용·철도 해직자들이 돌아가셨다. KT·삼성, 그리고 수많은 사업장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사측의 부당노동행위로, 해직의 고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분들을 기억하고, 연대하고,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살아 있는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찬 새해가 되기를 기원하며, 우리들이 애용하는 건배사로 새해인사를 대신할까 한다. 빠(빠지지 말자)! 삐(삐치지 말자)! 용(용기 잃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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